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벼리 Apr 08. 2024

아이를 위해 떠나온 여행이었는데

내가 자라고 있었다.

웰컴티를 마시며 방배정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이가 신이 났다. 바다가 보이는 레스토랑 바다가 보이는 숙소  

여기에 아빠까지 있다면 정말 완벽하겠지! 아빠가 보고 싶다고 뾰루퉁해 보인다.

맞아, 아빠도 함께 온다면 정말 좋을 텐데 대한민국 가장의 무게가 참 무겁다.


여행의 피로감이 몰려온 나는 낮잠이나 한숨 자고 싶은데 잠깐만 앉아 있어도 충전이 되는 만 8세 어린이의 체력은 나를 재촉했다. 바로 앞바다에서 스노클링이 가능하다는 말에 가방을 뒤적이며 수영복과 이날을 위해 거금을 들여 사온 고프로도 챙긴다.


타고 온 보트 선착장에서 해변가로 가는 제티(나무 선착장) 위에서만 보는데도 형형색색의 산호들과 알록달록한 말미잘들 그 사이에 니모(크라운 피쉬)가 보일정도의 맑은 물을 자랑하는 세라야 섬이었다.

깃대돔과 니모(물밖에서 서서 찍은 사진)

이곳 리조트는 산호를 보호하고 살리기 위해 산호를 심고 가꾸고 자연친화 적인 방법으로 리조트를 운영하며 환경보호에 동참하고 있다는 광고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아이와 단 둘임에도 비행기에 배까지 갈아타고 여기에 와보고 싶었다.



 

나와 아이는 수영을 매우 좋아하고 꽤나 잘하는 편인데도 가이드 없이 아이랑 바다로 들어가 스노클을 하려니 왠지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아이의 안전까지 내가 다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과 이렇게 산호가 살아있는 건강한 바다는 처음이라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마음으로 물에 들어간다.


처음이라 어색하지만 고프로로 우리 둘의 행복한 이 모습과 환상적인 인도네시아 바닷속을 찍기 위해 만발의 준비를 하고 입수!


하지만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분명히 완충이 된 걸로 기억했던 고프로는 뜨거운 햇살 때문인지 입수하자마자 얼마 되지 않아 경고음을 내며 전원이 꺼져버렸고, 바다생물에 대한 지식이 남다른 딸아이는 물에 들어가자마자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트리거 피시를 목격한다.


트리거 피쉬는 보통 산란기에 예민해져서 본인보다 큰 생명체를 이빨로 물어뜯으며 공격하기로 유명한데

내가 봤을 땐 아직 성체가 아니라 무사해 보였다만

가이드가 없어서였을까, 엄마가 못 미더웠나 아이는 계속 피해야 한다며 나가자며 졸랐다.


그렇게 나무계단을 힘겹게 올라 아이를 진정시키며 물었다.


"그래서 물에 들어가지 않을 거야?"

"아니~ 이제 트리거 갔을지도 몰라 다시 들어가 보자!"


다시 또 힘겹게 계단을 내려간다. 오리발을 신었고 바다로 내려가는 제티의 나무계단은 해초와 이끼들로 미끄러워서 위험했다. 아이가 다칠까 봐 긴장한 상태로 아이를 케어하며 스노클을 하다니 이건 스노클이 아니라 육아전지훈련 해상 편 정도 되는 난이도라고 생각하며 바다에 들어갔다.


"엄마!!! 나가자!!!!"


이번에는 또 뭘까 하고 보니 세상에 라이언 피쉬가 있다.


라이언 피쉬는 사자갈기처럼 뾰족한 갈기들이 있는 물고기인데 본인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면 갈기 끝에 있는 가시에서 독을 쏘는 물고기로 유명하다. 아이와 내가 어떻게 이렇게 바다생물 지식에 해박하냐고요?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절대 모를 수 없는 '바다탐험대 옥토넛' 덕분이다. 바다를 탐험하며 위험에 빠진 바다생물들을 구조해 주는 오토넛 대원들 덕분에 나는 이날 힘들게 계단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극기훈련을 했다.


"우리가 공격하지 않고 멀리서 바라만 보면 괜찮을 거야, 그래서 이제 방으로 갈 거야?"

"아니- 이제 라이언피쉬가 집에 갔을 수도 있지, 다시 들어가 보자"


이놈 자식이!


 



그렇게 여러 번의 계단 고문을 받은 나는 아이를 달래서 방으로 돌아와 씻고 저녁 먹을 준비를 했다.

아까 고프로가 방전이 되었지, 충전을 해두어야 내일 쓸 수 있으니까 하고 뚜껑을 연 순간 고프로 안에 물이 흥건하게 젖어 있는 것을 발견.


아까 들었던 낯선 경고음은 배터리가 방전되는 소리가 아니라, 침수되는 경고음이었던 거다.


왜 내게 이런 일이.

급하게 물기를 닦아내고 드라이기로 말려 보았지만 이미 배터리 단자에는 침수 때 전류가 흐르면서 탄 자국이 검게 나 있었다. 코모도섬 여행을 위해 사온 고프로였다, 우리는 이제 스노클을 하루 겨우 시도했을 뿐이고 앞으로 일정에 코모도 투어도 가야 하고 만타가오리 투어도 가야 하는데 고프로가 고장나버리다니.


물에 들어가기 전 가벼운 방수테스트를 해보지 않았을까 스스로에게 너무 짜증이 났고 고프로만 믿고 핸드폰 방수케이스 하나 챙겨 오지 않는 나에게 너무 화가 났다.


나는 원래도 계획을 세우는 걸 좋아하고, 계획대로 일이 진행이 안되면 당황하고 스트레스받아하는 요즘 유행하는 MBTI로 극 J의 성향인 사람이다.

문제를 맞닥뜨리면 그 문제 자체에 대해 오래 힘들어하는 사람이지만, 아이랑 단둘이 여행하며 그런 모습들을 보이지 않으려 매우 노력하고 있었는데, 이번만큼은 참아지지가 않아 결국 또 눈물이 나오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마음 같아선 마음껏 짜증 내고 마음껏 화내고 싶은데

아이에게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어서 나는 또 감정을 다스리려고 노력했다. 내가 당황하고 불안해하는 걸 내색하지 않으려고 정말 많이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나의 불안을 옆에서 고스란히 느끼고 함께 긴장하고 있음을 이번 여행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채채야, 고프로는 어쩔 수 없어, 우리가 해야 할 건 대신에 할 수 있는 걸 찾는 거야. 알겠지?"



말은 저렇게 했지만 아이가 안 볼 때마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고 레스토랑에 도착해서도 목이 메어 한입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엄마가 보고 싶고 남편이 보고 싶었다. 삼십 년이 넘게 살았고 애까지 낳아 8년을 넘게 키웠는데도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구나 싶다.


결국 아이 몰래 계속 눈물을 훔치며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너무 화가 나, 이곳에 언제 또 올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 어쩌면 평생 못 올지도 모르는데 너무 아쉽고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어]


[또 가면 되지, 내가 보내줄게 걱정 마, 그때는 같이 가자]


나는 참 안 되는 게 많은 인생이다 하고 살다가 떠나온 여행에 역시나 나는 안되는 거 투성이네 하고 울음이 터져버린 나에게 남편은 다 잘 될 거야.라고 5000킬로미터가 떨어진 곳에서 달래주었다.




"채채야 우리에겐 플라스틱 채집통이 있고 지퍼백이 있어. 여기에 핸드폰을 넣고 바다로 들어가면 핸드폰이 망가지지 않고 바다를 찍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엄마!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다!! 내일 또 스노클링 하자. 라이언피쉬랑 트리거 피쉬가 내일은 쉬는 날일지도 모르잖아~"


테라스에 앉아 파도소리 들으며 시원한 맥주를 즐기려던 꿈은 하루종일 긴장하고 계단 오르락내리락거리느라 다 써버린 체력 덕분에 정말 꿈으로만 남은 세라야 섬에서의 첫날 밤이었다.


해외원정 육아극기훈련 프로그램 중 하나, 오리발 신고 계단 오르내리기.




아이의 눈을 통해서 내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배우고, 안되는건 빨리 잊고 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

아이를 위해 떠나온 여행이었는데, 내가 자라고 있었다.


이전 04화 바다를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