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못 올랐어도 괜찮았던 이유
이른 아침부터 보트를 타고 투어를 나가는 날,
이 수많은 커플들 중 누구와 함께 투어를 떠나게 될지 긴장하고 있던 나는, ‘저 커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
‘저 어르신들 무리와 함께라면 내가 아이 혼자 데리고 험난한 투어를 가는데 좀 든든하지 않을까’ 하는
나 혼자만의 시나리오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느라 음식은 거의 다 남긴 채로 약속된 시간이 되었다.
왜 이렇게 못 먹었냐 걱정하는 레스토랑 직원들에게 코모도를 만날 생각 하니 너무 떨려서 밥이 안 먹힌다고 웃어 보였고, 투어를 도와줄 다이브샵 직원들과, 레스토랑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던 조용한 커플과 함께 라부안바조 항구로 출발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멕시코에서 온 4인가족을 만났고! (나도 모르게 너무 반가워서 아주 큰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나 홀로 여행 중인 인도네시안 남자분을 태우고 우린 제일 먼저 파다르 섬으로 향했다.
이왕 가기로 했으니 남들은 어떤 투어를 이용하는지 그 코모도 섬에는 어떻게 가는지 여행 계획을 세우며
이 지역에 대해 공부를 했다. 내가 여행 계획을 준비할 때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행후기가 오랫동안 끊긴 뒤였고 코로나 이전에 후기들조차도 한국 사람들 후기는 많이 찾기가 어려운 곳이라
여행을 준비하는데 애를 먹었다. 여행경험이 만렙인 사람들이면 뭐가 어렵겠냐만은 나처럼 소심하고
영어가 잘 안 되고 어린아이까지 책임져야 하는 여행에는 사전조사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여행준비를 하던 그즈음, 인도네시아 조코위 대통령은 이 코모도섬을 국제적인 관광지로 띄우려고 애쓰는 중이었고, 그래서 이 국립공원 입장료는 지금보다 10배를 올린다고 했다가 현지인들의 거센 반발로 미뤄졌다, 대신 외국인 요금만 얼마가 올랐다더라 등의 카더라식의 번역된 인터넷 기사로만 확인이 가능했어서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어쨌든 이왕 간다면 코모도 드래곤 말고는 뭘 볼 수 있을까? 하고 검색하던 중
내 눈에 띈 건 파다르 섬과 핑크 비치였다.
이런 곳이 실존한다고? 눈을 의심했다. 사진 보정이겠지. 진짜인지 가까인지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어느 순간 나는 매일매일 꿈에서 이 핑크비치와 파다르 섬을 올랐다.
주위 사람들에게 핑크비치 사진을 보여주며, 내 두 눈으로 직접 보러 인도네시아 코모도섬에 갈 거예요! 하고 흥분해서 떠들어대면, 열에 아홉은 그거 다 보정이에요, 직접 보면 그런 느낌 아닐걸요?라는 반응들이라
나는 이 낭만 없는 관광객들. 하고 혼자 울분을 삼켰더랬다. 사실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고 쿨하게 넘길 수 도 있는데 내가 코모도 섬에 간다고 했을 때 나를 응원해 주는 건 단 한 사람 내 동생이 유일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내가 보란 듯이 잘 다녀와서 보정이 아니라 정말 핑크모래가 가득한 바다라고 기사라도 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일 년 가까이 준비했던 여행길에 오른 우리 모녀, 달리는 보트에서 남들이 경험하고 올려둔 사진으로만 보던 곳을 내가 직접 두 발로 걸어보고 두 눈으로 볼 생각을 하니 좀처럼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인도네시아 코모도섬이 있는 플로레스 지역은 적도 근처라서 햇살이 무척 강렬했는데 채채와 나는 땀도 많이 흘리고 더위도 많이 타고 평발을 가지고 있는지라 저 파다르 섬을 아이가 끝까지 오를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었다.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 그 파다르 섬에 드디어 도착했다.
가이드를 따라 조심히 보트에서 내리고 섬에 있는 가이드에게 섬에서 하지 말아야 할 주의사항들을 듣고 오르기 시작한다. 나무와 돌로 이루어진 계단들이 있어서 오르는 게 크게 어렵지는 않았지만 관광객들이 많아서 줄지어 오르는 덕분에 걸음이 늦어지면 안 된다는 부담감과 함께 우리도 열심히 올랐다.
타들어가는 햇빛에 숨이 턱턱 막혔지만 챙겨 온 물로 계속 수분을 보충해 주고 가끔 뒤를 돌아보면
정말 거짓말 같은 풍경들이 내 눈앞에 펼쳐진다. 내가 정말 여길 오르다니, 꿈만 같았다.
한 덩어리의 섬에 화산재로 이루어진 검은 모래비치, 하얀 산호모래로 이루어진 화이트 비치, 핑크산호모래로 이루어진 핑크비치가 한눈에 보인다. 정말 특이한 지형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바다에 저렇게 모래색이 다를 수 있는지 신기해하면서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했다.
"힘들지 않아? 힘들면 얘기해"
"엄마!! 여기 올라가 보는 게 엄마 소원이랬지? 나 할 수 있어! 하나도 안 힘들어!"
하고 다람쥐가 나무를 오르듯 나보다 몇 걸음 먼저 앞서서 씩씩하게도 걷는 아이를 보며
눈가가 뜨거워졌다.
딸하나 애지중지, 천상 자기밖에 모르는 어린아이인 줄 알았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 아이의 다른 모습을 많이 발견했다. 특히나 나의 친정아빠는 양가 집안에 유일한 어린이인 오냐오냐 곱게 자란 손녀딸이
당신의 딸인 나를 고생시킬까 봐 여행 전부터 매우 걱정을 하셨었는데, 내 가방을 나눠 메고 캐리어를 함께 끌고 본인몫의 짐을 챙기고 정리하는 아이의 여행을 보면서 우리 채채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구나 하고 기특해하셨고, 우리 딸이 딸아이 하나 잘 키웠네 하고 칭찬도 아끼지 않으셨다.
그렇게 아이도 나도 각자의 몫만큼 성장하고 있음이 느껴지는 여행이었다.
오르는 내내 힘들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곳마다 놀라서 뛰어가는 풀벌레들을 보며
까르르 웃고, 처음 보는 형형색색의 나비들을 발견하고 즐거워하고,
하늘 위를 날고 있는 독수리를 보며 아빠에게 보여주자! 하고 사진과 영상을 찍고
우리만의 속도로 파다르 섬을 올랐다. 정상까지 한 텀이 남았는데 갑자기 아이 표정이 좋지 않다.
"엄마 나 갑자기 너무 어지러워"
그럴 만도 하지, 열이 많고 더위를 많이 타는 우리는 더 무리하지 않고 마지막 휴게스팟에서 등산을 멈추기로 한다. 정상에 오르는 꿈을 오랫동안 꿨었는데 이 날 나의 정상은 아이와 트래킹을 하는 순간부터 이미 오른 것이나 다름없이 마음이 가득 찾기 때문에 아쉬움 따윈 전혀 없었다.
천천히 해변에 내려왔더니 사슴들이 코코넛을 먹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하며 코코넛을 먹는 사슴이라니! 한국에 돌아가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면 이거 다 합성이야~라고 하려나? 그땐 이거 내가 찍은 사진이야! 하고 말해줘야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정상을 찍고 올 일행들을 기다렸다.
두 번째 스팟은 여행 중 내가 가장 기대했던 핑크비치
핑크색 모래로 뒤덮인 해변인데 인도네시아 곳곳에 존재하는 것 같았다.
붉은 산호가 부서져서 해변에 떠밀려와 모래와 함께 섞여 있는 거라고 했는데, 실제로 보면
해가 너무 뜨거워서 더 진하고 예쁜 분홍빛으로 보인다.
그거 다 보정이라고 했던 사람들아! 실제로 보면 사진이 눈으로 보는 것만큼 못 담아내고 있던데 결국 또 경험한 자들만 아는 귀한 모습을 마음속 보물처럼 간직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해 본다.
이곳에서 자유시간이 1시간가량 주어졌는데 우린 채채와 첨벙거리며 발 담그고 물고기를 쫓고, 하염없이 비치를 바라보고, 사진도 많이 찍었다.
이때의 내 기분은 글자 몇 자로 감히 표현할 수도 없을 정도의 감정이었는데,
나만 여기와 있는 것이 내가 아는 모두에게 미안할 정도의 행복감이 밀려와 또 눈물이 났다.
처음 라부안바조로 와 세라야 섬으로 향하던 날엔 내가 정말 여기에 와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질 않아서 울었고
세라야 섬에서는 자꾸 안 되는 일들 때문에 눈물이 났는데 이 날은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났다.
눈물이 많아 울보라는 별명을 가진 나인데, 별명값을 톡톡히 하는 중이었다.
투어업체에서 제공해 준 점심을 먹고 이제 채채의 소원이라는 코모도 왕 도마뱀을 보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