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라 불리던 고통, 상담실에서 이름이 되다

회복의 문이 열리다

by 빛나는조각

우리는 우연이 아니라, 운명이었다.


내 상처는 자연스레 ‘상담’이라는 학문으로 향했고,

‘상담’ 또한 조각난 나를 불러들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터질 대로 터진 내 상처들이 상담을 향해 울부짖었고,

상담 또한 나를 향해 손짓했다.


「손잡이를 열고 들어선 회복의 문」


약을 먹은 지 2주쯤 지나서야,
드디어 상담사와 연결될 수 있었다.


트라우마 전문가들이 모여 있는 그곳은
집에서 차로 40분쯤 되는 거리에 있었다.


가는 길이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아마 마음 한편에서
‘내 회복의 여정도 이렇게 멀고 길까’

하는 생각이 스친다.


조금 일찍 도착해 센터 안으로 들어섰다.

대기실에 앉으니 왠지 모를 긴장감이 어깨 위로 전해진다.

탁자 위에는 컬러링 책과 색연필들이 놓여 있었지만,
손이 닿지 않는다.


그렇게 15분쯤 지났을까,
상담사 E가 나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녀의 첫인상은
친절하면서도 냉철했다.


두 가지 상반된 인상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게 내가 그녀에게
처음으로 믿음을 느낀 이유였을 것이다.


안경 너머로 마주한 시선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했다.

나를 잘 이해해 주면서도,
내 여정을 단단하게 붙잡아줄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상담실은 조도가 낮고,

회색 소음이 잔잔히 깔려 있었다.
상담 내용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장치라고 했다.


그 어둑한 조도는
이상할 만큼 나를 편안하게 했다.
따뜻한 이불을 덮은 듯,
낯선 공간인데도 안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동시에,
최면에 걸릴 것 같은,
마치 내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것들이
끌려 올라올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편안하지만 두려운,

무언가 일어날 거 같지만,

무언가 잠재워질 거 같은

상반된 느낌과 생각들이 떠오른다.




「이름이 된, 내 아픔」


여러 차례의 면담과 검사지를 거쳤다.


계속해서 재경험되는 과거의 장면들,
몸의 과도한 긴장,
끝없이 이어지는 자책.


오랜 시간 트라우마를 다뤄온 상담사 E는
내가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즉 C-PTSD 증상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 치료되지 않았을 뿐이에요.
트라우마는 치유될 수 있습니다.”


힘든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자주 나를 검열하고 미워했다.


“너, 얼마나 못났으면.”
“정말 너네 엄마 말대로, 아빠를 닮아서 그런 거 아니야?
진짜 정신이 이상한 거 아니냐고!”


어릴 적, 그토록 듣기 싫어 몸부림치던 말들이었다.
그 목소리는 더 이상 엄마의 것이 아니었다.


피할 수도 없었다.


내 안에서, 내가 그 말을 반복했다.

그 누구보다 자주, 그리고 끊임없이.


그 누구도 이 정도로 나를 몰아세우진 않았을 것이다.
나는 나에게 잔인했다.



「오랜 시간 기다려온 한마디」


진단 이후,
전문가가 나에게 ‘너 마음껏 슬퍼해도 돼’라는
권한이라도 준 듯,


‘네가 못나서 그런 게 아니야.
네가 아빠 닮아서 그런 게 아니야.’
라고 확신이라도 해준 듯,

그제야 난 많이 울었다.


처음으로,
나는 내가 아팠다.

그리고, 나 자신이 슬펐다.


나 자신을 미워하며
잔인한 말들을 퍼부었던 내가,
그 순간만큼은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내 안에서,
아주 오래 기다려온 한마디가 들려왔다.


“그동안 정말 많이 아팠지.”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고,
시야가 희미해진다.


오랫동안 좋아했지만,
닿을 수 없었던 문장이 떠오른다.



오늘에서야,

그 문장은 머리에서 마음으로 내려온다.



“나는 나 자신을 돌본다.
내가 더 외롭고, 더 친구 없고,
더 아무에게도 기대지 않을수록,
나는 나 자신을 더 존중할 것이다.”
— 제인 에어


나는 나 자신을 돌본다.

내 안의 내가 나를 잔인하게 대하는 그 순간에도,

기댈 누군가가 아무도 없더라도,


나는 나 자신을 놓지 않는다.





@sprinkle.pi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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