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알약으로 시작한 지옥탈출, 마주한 현실의 벽

지옥의 끝을 지나, 회복의 문 앞에 닿다

by 빛나는조각

정신적 낙인은,

내가 오랜 세월 꾹꾹 눌러왔던 모든 것을 터뜨렸다.

어린 날부터 쌓여온 감정들과 기억들이
비명을 지르며 한꺼번에 뛰쳐나왔다.


정신적 낙인—

그것은 늘, 엄마가 내가 당신의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해오던 것이었다.


"너네 아빠는 정신병자야.

너 너네 아빠 닮은 거 아니야?"


온갖 억울함과 분노가 올라왔다.


나는 현재의 사건에

어린 시절의 경험까지 덧대어 더 크게 경험하고 있었다.


자다가도 심장이 세차게 뛰어 깨어났고,
낮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가 차오를 때면

혼자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너무 버거웠다.

그냥 이대로 무너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아이들 때문에 마음껏 무너질 수도 없었다.


나는 도미노의 첫 칸이었다.

내가 쓰러지면, 그다음은 아이들이었다.
그건 끔찍했다.


어린 날, 나는 우리 엄마가 무너지는 걸 보며
함께 무너졌으니까.


엄마처럼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무너지며 함께 무너지는 고통은,
나 하나로 충분했다.



「현실과 용기 사이」


하지만 막상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겠다고 마음먹자,
현실적인 어려움이 머리를 스쳤다.


상담실까지 오가야 하는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비용.


생각보다 높은 비용의 벽 앞에서,

마음이 움츠러들었다.


동시에

“이번에는 정말, 내 상처를 제대로 다뤄보고 싶어.”라는 생각이 스친다.


비용을 절약해야 한다는 마음에,

스스로 상담자가 돼 보려고도 했다.


트라우마 관련 책들과 논문을 찾아 읽었다.

하지만,

내가 증상들과 원인들을 가지고 가까운 진단명을 찾아냈다 하더라도

그건 확실한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트라우마를 다룬 전문가라면,

정말 내가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와 비슷한 다른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을 거 같았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현실적인 대안을 찾았다.
보험이 적용되는 범위 안에서,
트라우마를 전문으로 하는 곳을 선택했다.


어쩌면 1년 이상 이어질지도 모를 여정이지만,
이제는 혼자 견디지 않기로 했다.


그때 문득,
상담을 공부하고,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거의 내 모습이 스친다.
“사람들은 상담을 전공한 내가
상담실에 다닌다면 뭐라고 할까.”


헛웃음이 나왔다.


상담전공자가 내담자가 된,

그 오묘하고 모순된 거 같은 순간이 그려지면서.



「작은 알약, 몸을 지배하다」


상담사와 바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약을 먼저 처방받을 수 있었다.


불안을 누그러뜨리고,
기분과 신체의 긴장을 완화시켜 준다는
작은 알약 하나.


집으로 돌아와
손톱 반만 한 약을 삼켰다.


그 작은 알약 하나가
내 몸을 거세게 흔들었다.


소화가 되지 않았고,
위에 돌덩이가 앉은 듯 불편했다.


먹은 것을 다 게워내니 두통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 두통을
원래 먹던 진통제로 달랠 수도 없었다.
처방받은 약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결국, 약의 도움 없이 고스란히 그 밤을 버텨냈다.


다음 날 아침,
다리가 후들거렸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한들,
나는 여전히 일상을 살아내야 했다.


일단, 가족들의 식사를 챙겼다.
그리고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몸을 던지듯 누웠다.


“평범했으면 어땠을까? 나 왜 이렇게 약까지 먹으면서 힘들어야 돼?”

억울함이 밀려오며 눈물이 흐른다.


그날 이후, 전문가와 상의해
약의 용량을 조금 줄였다.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대신 이번에는 무기력이 밀려왔다.


선을 넘은 사람들에 대한 화를 낼 힘도 없었지만
내가 꾸준히 해오던 운동에도,
심지어 사소한 일상에도
아무런 힘이 나지 않았다.


이 작은 약이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

다른 일에는 힘이 없는데
먹는 일에는 힘이 생겼다.


자주 배가 고팠고,
이상하게도 단맛이 나는 음식이나
밀가루가 들어간 음식이 유독 당겼다.

낮에는 이유 없이 잠이 쏟아졌다.


회복의 첫걸음은 무거웠다.

쉬이 나에게 "회복"이라는 단어가 허락되지 않는 느낌이었다.


지옥에서 달려 나와

허름한 모습으로 회복의 문 앞에 서있었지만

문의 손잡이를 잡아 열 힘이 없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는다.


그 문 앞에 기대어 되뇐다.



“오늘은 이걸로 됐어.

문 앞에 왔잖아”





@sprinkle.pi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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