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살짝 화가 올라오는 순간은 나에게 공포다.
그 감정 자체보다,
그 감정이 더 커질까 봐 두려운 마음이
나를 먼저, 더 크게 덮친다.
화가 난 나를 보는 순간
몸이 먼저 긴장하고,
그 긴장은 다시 화를 키운다.
화내는 내 모습이 끔찍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몸은 이미 반응을 시작해 버린다.
머리는 멈추라고 소리치는데,
몸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이미 화 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마치
물을 조금 엎질렀을 뿐인데
“어떻게 하지, 큰일 났다”라는 긴장감이
너무 빠르게 올라와서,
사실은 컵을 살짝 들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확,
물을 엎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그리고 그다음,
순식간에 밀려오는 감정은
‘수치심’이다.
‘화를 낸 게 후회돼’라는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라,
“나는 정말 엉망이야.
앞으로도 누군가를 해칠 것 같아.
나는 유해한 존재야.”
이런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이
나를 덮치며
정신이 하얘지고 멍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수치심의 정의는
누군가 앞에서 자존심이 무너질 때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수치심은,
그보다 더 안쪽에서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감정에 가깝다.
존재에 대한 경멸 —
수치심은 트라우마 사건이 있어야만
생기는 특별한 감정은 아니다.
수치심을 다룬 브레네 브라운의 저서
《The Gifts of Imperfection》에서도
수치심은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말한다.
나에게 화가 나려는 상황이
왜 그토록 두려운지,
화를 내고 난 뒤
왜 수치심이 나를 덮쳐오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을 때
나는 그 안에서
한참을 헤맸다.
근원과 뿌리는, 늘 그렇듯
어린 시절에 있다.
나는 공부나 눈에 보이는 성과를
강요받는 환경에서 자란 편은 아니었다.
‘무언가를 해야 사랑받는다’는 조건은
비교적 희미한 편이었다.
그러나
다른 하나의 조건은
분명히 존재했다.
‘무언가를 하지 말아야 사랑받는다’는 규칙.
특히
언니와 싸우는 것,
그리고 화가 나서 화를 내거나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는 것.
이런 것들은
우리 집에서
‘악한 것’에 가까웠다.
그것은
우리 가족을 파국으로 몰고 간
아빠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어느덧 내 안에서도
싸우는 것, 화가 나는 것,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는 것은
아빠와 동일한 것이 되었다.
가족에게 화를 낸 뒤
밀려오는 그 수치심은,
“나는 아빠처럼 유해해.
나는 사람을 괴롭히는 존재야.
나는 앞으로도 그럴 거야.”
라는
고통스러운
자기 확신이었다.
이 수치심과 반대편에 있는,
즉 존재에 대한 허용은
어떻게 얻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나는 충분하다”는 감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 말은
수없이 들어왔지만,
여전히 내게는
가슴으로 경험하지 못한
생경한 언어였다.
나는 먼저
인생의 모든 여정이 그렇듯,
완성된 상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오늘은 수치심이
사라진 것 같아도
내일 다시
찾아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완성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사실.
수치심이
한 번에 지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오히려 내게 위로가 된다.
완벽을 요구하면서
결코 닿을 수 없는 목표는
늘 좌절을 부르고,
결국
수치심을
더 깊게 만들 뿐이니까.
그리고 나는
생각으로 나를 설득하는 사람이 아니라,
경험으로 나를 허용하는 사람이 되려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감정을 없애려
애쓰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두는’
짧은 순간들.
나를 다그치지 않는 태도.
나를 몰아붙이지 않는 태도.
바로,
존재에 대한 허용.
충분하다는 감각을 얻고 싶어
타인에게 기대며 버텨온 시간들이
스쳐 지나간다.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조용히 안도한다.
그리고
나는
나를 향해
앉는다.
존재를 다그치지 않는 작은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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