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함으로 서다

트라우마의 안개를 지나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길

by 빛나는조각

생각보다 자신을 ‘예민한 사람’으로 분류하는 이들이 많은가 보다.
예민함을 다룬 책들이 꾸준히 보이고, 관련 유튜브 영상의 조회수도 높은걸 보니
‘내가 예민한 게 특별한 일은 아니구나’ 하며
묘한 위로를 받게 된다.


나 역시 주변 사람들에게 종종 “너 예민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속에는
내가 사소한 말과 상황을 오래 붙들고 곱씹는 데서 오는 피로감과
어딘가 비난의 기색이 함께 섞여 있었다.


한국에서 “예민하다”는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는 일에 마음이 걸리는 사람이다.
굳이 느낄 필요 없다고 여겨지는 감정까지 깊이 느끼는 사람에게
가볍지만 선명한 거리감을 두며 건네는 말처럼 들린다.


각자의 정의가 조금씩 다르든 비슷하든,
나도 오래전부터 나를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나는 오감이 민감하고, 사람의 표정과 말투,
여러 사람이 모인 공간의 공기 흐름까지
쉽게 읽어내는 편이다.


「두 종류의 예민함 사이에서」


내 예민함은 트라우마의 결과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나에게 있었던 기질일까.


HSP라고 불리는 타고난 예민함과
트라우마 이후에 생기는 예민함은
놀라울 만큼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

하나는 성향이고, 하나는 사건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무게는 다르지만
평균보다 더 많이 감지하고, 더 오래 생각하고,
더 세밀하게 읽어내는 능력은 닮아 있다.


어떤 이들은 둘의 차이를 선천성과 후천성으로 구분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술적 감수성이나 공감의 깊이로 구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 트라우마는
어쩌면 태어나던 순간부터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선천과 후천을 정확히 가르는 일이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다만 예술작품 앞에서 섬세하게 반응하고,
공감 능력도 높은 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나는 두 가지 모두를 지닌 사람에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림이나 음악, 문학에 대한 나의 감각은 세밀하게 살아 있다.
그림에서는 아름다움을 읽어내고,
음악에서는 슬픔의 결을 찾아내며,
문학에서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이해한다.


하지만 이런 면들만으로는
내가 선천적인 HSP라고 단정하기엔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다.


예술작품 앞에서는 섬세하지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는
정작 ‘내 마음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는 트라우마의 예민함과 선천적 예민함의 차이이면서도,
트라우마의 깊은 흔적이다.


언젠가 친한 친구에게 물은 적이 있다.
“OO야, 가슴 아픈 게 뭐야?”

친구는 잠시 놀란 듯하다가 말했다.
“누군가의 아픔을 볼 때나, 내 일로 슬플 때… 정말 가슴이 아파.”


그 순간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나는 언제 가슴이 아팠지?’
‘아니, 그런 느낌을 마지막으로 느낀 게 언제였지…?’


사람들이 선을 넘는 순간에도
화나거나 슬프기보다
몸과 마음이 먼저 ‘얼어붙는 상태’가 찾아올 때가 많았다.
‘이게 뭐지?’ 하는 당혹감이 남는다.

누가 들어도 마음 아플 말인데
내 마음은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그런데 아프지 않은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마땅히 ‘아파야 할 기능’을 잃어버리고
그 자리를 머리로 대체한 것처럼—
많이, 자주, 그리고 오래 생각이 났다.


오래전 상담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렇게 다 느끼고 살았으면, ㅇㅇ씨… 지금까지 살아낼 수 있었겠어요?”

그 말에 대한 감정은 희미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문장이 남아 있다는 건
어딘가 내 안에 닿았던 말이라는 뜻일 것이다.


「예민함이 글에 쓰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느끼지 못한 감정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글을 쓰면서도
여전히 감정보다는 생각이 앞섰다.
감정을 세밀하게 느끼지 못하니
대신 생각의 세밀함을 더해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민한 사람은
한 자극에서 여러 층위를 동시에 받아들이는 뇌 구조를 가진다고 한다.
나 역시 한 사건에서 여러 갈래의 의미를 찾아내는 데 익숙했다.
하나를 보면 여러 생각이 동시에 떠오르고
그만큼 쉽게 피로해지곤 했다.


그런 내가 예민함을 글에 쓰기 시작하면서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글로 정리될수록 생각이 명료해지고,
회복의 언어가 쌓일수록
내 정서적 안정의 비율이 조금씩 높아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처음으로 이런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 예민한 감각을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데 써보고 싶다.”


글을 쓰다 가끔 감정을 떠올려보기도 했다.
오래전부터 멈춰 있던 기능이라 어색했지만
조금은 신기하고, 즐겁기도 했다.


그렇게 감정의 단어들이
아주 작게 흘러나오는 순간이 있었다.
작지만, 나에게는 큰 변화였다.

오랫동안 잠겨 있던 자물쇠가 열리고,

문이 아주 살짝 열린듯한.


예민함이 글에 쓰였고,
나는 예민함으로 글을 썼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이런 꿈을 꾼다.


트라우마의 안개가 걷히고
어둠이 흩어진 자리 뒤,
아름다운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것 같은 꿈.


오늘도 나는
예민함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여린 마음으로,
기꺼이 넓고 깊게 보겠다는
조용한 의지를 가지고.




몸과 마음이 여린 사람들을 위한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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