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이라는 늪을 지나,
흔들리며 걷다

불완전한 채로 걷는 용기

by 빛나는조각

「완벽과 영원, 그 달콤한 기만」

어려서는

“결국 공주와 왕자는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동화를 믿었고,

조금 자라서는

배우와 배경만 바뀔 뿐,

여전히 잘생기고 부유한 남자주인공이

예쁘고 착한 여자주인공을 구원하는

드라마 속 서사를 믿었다.


세월이 흐르며
그 로맨틱한 서사에 대한 환상은 깨졌지만,
조건만 달리해
행복에 도달하려는 노력과 열망은
계속되었다.


애쓰고 노력하면
언젠가는 완벽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고,
한 번 도달하면
그것은 영원할 거라 믿었다.


수능만 끝나면,
직장만 가지면,
결혼만 하면,
아이만 낳으면,
내 집만 가지면.


‘~만 하면’
닿을 것 같은
완벽한 행복을
나는 꿈꾸었다.


조건에 도달할 때도 있었고,
도달하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몇 개의 조건을 넘어서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영원한 행복,
그런 건 없다는 것을.

조건 위에 올라섰다고 느낄 때조차
만족을 느낄 새 없이
인생은 나를 시험했고,
삶은 단층이라기보다 복층이고
단면이라기보다
입체에 가까웠고,
훨씬 더 복합적이었다.


그때,
어린 날 읽었던 동화책에,
젊은 날 보았던 드라마들에
책임을 묻고 싶은
강한 욕망이 올라왔다.


완벽한 행복은 없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고,
누구에게라도 따지고 싶었다.


있는 것처럼 믿게 해놓고
이제 와서 나보고 어쩌라는 거냐고.




「완벽이라는 늪을 헤어나와」


배신감이 깊었던 것인지,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희망은
이제 더 이상 믿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절망보다 더 해로운 것일지도 몰랐다.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고
늘 닿을 수 없는 것에
목매게 하니까.


‘영원한 행복’,
‘닿지 못한 희망과 꿈’을
전제로 한 드라마와 영화, 책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는
거의 혐오하기에 이르렀다.


권선징악이
명확히 나뉘는 서사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사람들의 희망일 뿐,
일상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누군가를 단정 짓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완벽한 행복이 없듯
완벽한 사람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요즘 드라마가
막장이고 자극적이라고 말하지만,
지금의 드라마가 막장이라면
과거의 드라마들은
그냥 환상이었다.
그것도
반지의 제왕보다 더한.


그래서 나는 오히려
요즘 드라마들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잔인함을 더해
몰입을 유도하기는 하지만,
한 사람의 복합성을
조금 더 솔직하게 보여주고,
인간 내면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그게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완벽주의라는 건
어릴 때부터
조용히 심어진 무엇이었고,
매체가 끊임없이
주입해 온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흔들라며 걷는 미완의 길」


완벽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실패를 통해 배우지 못하는 사람처럼
또다시
어느새
그쪽으로 끌려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트라우마 치료를 받고,
글을 쓰고,
관련된 책을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왜 이렇게 회복이 더디지?”


그 질문 앞에서
답답해하고 있는 내가
어느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또 다른 내가
조용히 되묻는다.

“완벽한 회복이 어딨어.
너, 아직도 회복조차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니?”


어릴 적
완벽에 대한 환상은
괴로운 현실을 잠시 잊게 해 주었고,
현실을 더 열심히
살아내게 하는
동기가 되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완벽이라는 신념은
너무 무겁고 거추장스러워
오랜 시간
함께 가기에는
버겁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는
조건 속에서 나를 재촉하며
애쓰는 삶이 아니라,
그냥 존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쁨과 행복을
늘 미래로 미루며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지옥에서 나를 건져내다’라는
이 시리즈를 끝내며
나는 말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흔들리는 중이라고.


앞으로도 흔들릴뿐 아니라 넘어질거라고.


그리고 그 흔들림을,

그 넘어짐을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걸어가고 싶다고.



@sprinkle.pie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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