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야 할 선이 무너질 때
어디까지가 내 땅이고, 어디서부터가 네 땅일까.
어디까지 마음을 내보이고, 어디서부터는 지켜야 할까.
무엇을 허락하고, 어디서 멈춰야 할까.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 가까움은 너무도 쉽게 침범으로 바뀐다.
가족 안에서조차 경계를 지키는 일은 늘 어려웠지만,
어린 시절부터 나는,
이런 ‘선을 넘는 문화’가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음을 느꼈다.
내가 어린 시절, 선생님들은 ‘체벌’이라는 이름으로 학생의 몸을 쉽게 다루었고,
그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또, 어른들은 “너를 위한 조언”이라는 말 아래 자신의 가치를 주입했다.
그런 조언은 때로 폭력에 가까웠다.
“OO야, 너네 아빠 불쌍하잖아. 전화라도 해.”
“아빠랑 사는 사람한테 ‘엄마’라고 불러야지.”
나 같은 약한 존재는 더 눈에 잘 띄었던 걸까.
남들은 평생 한 번 겪을까 말까 한 일들이 내게는 쉽게 벌어졌다.
중학교 때, 버스에 앉아 집으로 가는 길에 술에 취한 아저씨가 올라탔다.
내가 흘끗 쳐다보자 그는 “뭘 쳐다봐”라며 내 뺨을 내리쳤다.
그날의 충격과 당혹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너무도 황당했다. 사람들로 가득한 버스 안에서
말려 주는 이도, “괜찮냐”라고 다가오는 이도 단 한 명 없었다.
집에 돌아와서도 이미 지쳐 있는 가족들에게
차마 이 일을 털어놓을 수 없었다.
어른이 된 뒤에도 누군가가 '선을 넘는 일'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다.
내면의 상처를 가리기 위해 잘 웃고,
잘 배려하는 모습으로 자신을 감싼 나는
착취를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사람들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곤 했다.
나라면 못하는 부탁을 그들은 쉽게 했다.
몇 번의 호의는 금세 그들의 권리로 굳어지곤 했다.
그런 경험 가운데 지금도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결혼 후, 아이들을 낳고 지내던 무렵 자주 만나던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이미 한 아이의 엄마였고, 내가 만날 즈음 둘째를 임신 중이었다.
늘 부부관계와 육아의 힘겨움을 몸과 말로 쏟아내던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출산 후 첫 아이를 서너 번 봐주었고,
몸조리 음식을 챙겨 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른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나는 그녀의 둘째를 잠시 안아주고 있다가 집으로 가려했다.
그 순간,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게 물었다.
“너 가면 내 애는 누가 봐?”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를 베이비시터로 취급하는 그 말은 분명히 '선을 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억울하면서도 동시에 헷갈렸다.
“내가 편해서 한말인데, 내가 너무 나쁘게 생각하나?”
나의 감정과 생각을 나 또한 속여갔다.
그렇게 내 안에서조차 경계는 허물어지고,
결국 나는 나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 많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경계를 침범당할 때마다 분노보다 먼저 혼란을 느꼈다.
혼란을 느끼며 자신을 탓했고, 뒤이어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분노가 밀려오기도 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편리나 의도에 따라 가지각색의 방법으로 사람을 통제하려 들었다.
그것은 종교모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구역장 집사님은 늘 우리 가족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여주길 바랐다.
자신이 아프면 내가 집사님의 역할을 대신하길 기대했고,
우리 가족이 다른 구역으로 옮길 때는
다른 구역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으며
“너희가 가서 고생할까 봐”라는 말로 포장했다.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는,
나와 어울리는 사람들에게 나의 험담을 하고,
나의 평판을 조작하려는 일도 있었다.
그랬다. 경계를 침범하는 사람들,
‘선을 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기만과 자기 중심성이었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면서도
마치 남을 위한 마음인 듯 포장했고,
심지어 그것이 진짜 ‘남을 위한 마음’이라고 스스로 믿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군가에게 들었다면 펄쩍 뛰었을 말도,
내가 감정 없는 인형이라도 되는 듯 서슴없이 내뱉었다.
때로는 공격적으로 다가왔고,
때로는 교묘하게 침범했다.
정기적으로 전화나 방문을 하지 않으면 삐지는 친구는,
“요즘 너 왜 나한테 연락 안 해? 넌 내가 아파도 모르겠네. 서운해.” 하며
자신의 서운함의 원인을 내게서 찾으려고 했다.
죄책감과 실망을 뒤섞어 던지는 그 얼굴은 모호해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수많은 경계 침범과 ‘선을 넘는 일’을 겪어 온 탓일까,
나는 반 발짝만 내 선에 닿아도
귀신같이 눈치채는 재주가 있었다.
그런 그의 말에,
“ '섭섭하다' 그런 말은 좀 부담스러워.” 내 대답은
되레 “그런 뜻 아니었어,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라는 식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인가는, 나도 공격성을 보인적도 있다.
“그런 건 보통 사람들이라면 지켜줘야 하는 선이에요.”
그런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는 참다못해 폭발한 사람이 아니라,
별것 아닌 일에 갑자기 터져 버린 사람처럼 비쳤을 것이다.
내게는 오래 눌러 두었던 코르크마개가 튀어 오른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뜬금없는 큰 감정의 폭발처럼 보였을 것이다.
늘 배려하며 남의 기분에 맞춰 주던 내가
어느 날 단호하게 경계를 세우니
그들이 그렇게 느낀 것도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회복의 길에서 알게 된 사실은, 나는 터지기 전에
경계를 단호히 세우는 ‘내 몫’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참아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나는 너무 오래 참아주는 편이었다.
'선을 넘는 일'에 대한 책임은 그들에게 있었지만,
나는 내 몫을 해야 했던 것이다.
먼저 잘해 주다가, 많이 참다가,
갑자기 맞서는 내 반응은
트라우마 이론에서 말하는 과순응(Fawning·상대에게 맞추며 자신을 희생하는 반응) →
폭발(Fight·오래 누적된 긴장·공포·억눌린 감정이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갑작스럽게 분노·눈물·언어적 공격)에 가까웠다.
또, 과순응(Fawning)으로 자신을 억누르며 버티다가 한계에 다다른 날에는,
갈등을 피하려 연락을 끊고 숨어버리는 회피(Flight) 반응으로 잠적하기도 했다.
그래, ‘내 몫’을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의 트라우마 반응이었다 하더라도,
그건 내가 만든 세상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경계 없는 세상과, 그 안의 경계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기만으로 자신을 감추고,
자기 중심성으로 모든 일을 해석했다.
그리고 그 무질서 속에서 가장 먼저 무너지는 것은,
언제나 약한 자의 마음이었다.
그 경계 없는 세상 속에서, 내 안의 상처들은 층층이 쌓여 갔고
그렇게, 내 마음은 병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