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내가 처음 만난 후, 우리의 삶은 마치 순풍을 타고 나아가는 배처럼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남편은 태국 사무실에서 일하던 중 나를 만나더니, 어느새 '디지털 노마드'가 되어 어디서든 자유롭게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삶을 누리게 되었고, 나 역시 남편 덕분에 회사 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었다. 만약 남편이 옆에서 든든하게 받쳐주지 않았더라면, 펜션이 완성될 때까지는 아마도 몸이 아프고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회사를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도 마찬가지로, 남편도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태국 사무실에서 에어컨 소리를 들으며 일하고 있었겠지. 하지만 우린 서로를 만나면서 진정한 '자유 패스'를 받은 셈이었다. 그 덕분에 나는 꿈꿔왔던 펜션 사업에 더 몰두할 수 있었고, 남편은 덤으로 파격적인 연봉 인상까지 받아버렸다. 이 모든 변화는 마치 우리가 서로의 '슈퍼 충전기'라도 된 듯한 시너지 효과 덕분이었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서로의 발목을 잡는 대신, 우리는 서로를 날게 하는 관계가 되었다. 정말이지, 우리의 관계는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영감과 힘을 주고받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한 예시였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서로를 만난 게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한 '계획된 운명'이었을 거라고 믿게 되었다. 함께하는 매 순간이 더 큰 성취와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고, 앞으로 펼쳐질 우리 미래가 더욱 기대됐다.
남편이 회사 회장님께 제안한 대로, 우리는 독일 베를린에서 한동안 살게 되었다. 그런데 '시너지 효과'와는 별개로 다른 나라로 이사한다는 건 단순한 여행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다. 익숙한 환경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은 마치 거대한 미지의 모험을 떠나는 것과 같다. 안락한 일상을 버리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새로운 나라로 간다는 건 말 그대로 '불확실성'을 껴안는 일이다. 안정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전혀 다른 문화와 환경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니… 정말 큰 결단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언어 문제가 먼저 발목을 잡는다. 내가 평생 사용하던 언어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어도 아니고 독일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접해야 한다니.. 그 나라 사람들과 어색하게 "구텐탁!" 하며 대화나 나눠볼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막막했다. 게다가 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 줄 거란 보장도 없고, 나 역시 그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귀가 쫑긋해질 테니 말이다. 그래도 이왕 떠나는 거, 뭔가 해봐야겠지..
문화적 차이도 또 다른 큰 도전이다. 한국에서는 여러 배달음식을 시켜 먹으며 TV 보는 게 평범한 하루였지만, 독일에서는 무엇을 주로 먹어야 할지조차 낯설다. 독일은 소시지, 맥주, 빵이 유명하긴 한데.. 한국 음식은 구할 수 있을까? 게다가 사회적 규범, 인간관계, 대화 스타일까지 전부 다를 것이다. 처음엔 이런 것들에 적응하는 데 꽤 시간이 걸릴 테지만, 그래도 한 발짝씩 내디뎌야 한다는 걸 안다. 물론 때때로 ‘내가 여기 왜 왔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며 조금씩 내 자리를 찾아가는 게 중요할 것 같다. 타지 생활에서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크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도 외로움일 것이다. 가족, 친구, 익숙한 얼굴들을 떠나 홀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건 감정적으로 쉽지 않다. 나는 이미 전에 타지 생활을 해보았지만 향수병이 오곤 했다. 이번엔 남편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오로지 남편만 의지해야 하고 마음을 나눌 친한 친구들이 없어 그리움이 슬며시 찾아올 수도 있다. 처음엔 새로 만나는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기도 어려워 어딘가 부유하는 기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선 노력하는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도 성장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결국 다른 나라에 정착하는 건 여러 가지 도전과 불확실성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만큼 개인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고, 새로운 환경에서 나만의 삶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엄청난 성취감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겠지. "그때의 고생은 나중에 추억이 될 테니까!"라고 말하며 나를 다독였다.
한편 이사 준비를 하다 보니, 우리 집이 작은 원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짐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결국 캐리어 6개를 꽉꽉 채우게 됐는데, 우리 물건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싸니 마치 우리가 이사를 가는 게 아니라 한국 전체를 옮기는 기분이었다. 사람이 살면서 필요한 게 이렇게나 많았던가?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굳이 그렇게까지 전부 다 가져갈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다. 냄비, 플라스틱 통, 여러 주방용품들과 심지어 사용하던 작은 테이블까지 넣으려다 남편이 말린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베를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왜 우리는 마치 무인도에 가는 것처럼 준비했는지 모르겠다. 결국 짐이 너무 많아 집을 구할 때까지 창고를 빌려 보관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창고 비용이나 새로 사는 비용이나 도긴개긴 아니었을까? 이쯤 되니 '새로 사면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자꾸 든다. 물가가 비쌀까 봐 괜한 걱정을 했던 걸까? 나중에 알았지만, 베를린에도 충분히 살 만한 물건들은 다 있었고, 우리 욕심이 과했음을 깨달았다. 한국에서 쓰던 물건들까지 꾸역꾸역 챙기려 했던 내가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뿐이다.
남편 회사 회장님의 배려 덕분에, 우리는 전에 업그레이드로 맛보았던 비즈니스 좌석에 앉아 편안하게 독일로 향할 수 있었다. 이전 회사에서 출장을 다닐 때마다 이코노미 좌석에 몸을 구겨 넣고 밤새 한숨도 못 자서, 도착하자마자 피로에 쩔어 체력이 바닥났던 기억이 생생히 났다. 좁은 좌석에서 꾸부정하게 앉아 목을 가누지 못해 상모 돌리는 고통이란... 하지만 이번엔 완전히 달랐다! 비즈니스 좌석의 넓고 푹신한 의자에 몸을 맡기고, 다리를 쭉 뻗으며 "이게 바로 일 때문에 거처를 옮기는 직원과 그의 배우자에 대한 예우지!"라고 남편에게 거드름 피우며 말했지만 속으로는 회장님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푹 자고 일어나니 컨디션도 최상, 시차 적응도 그 어느 때보다 수월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며 ‘이렇게 쾌적한 비행이라면 어디든 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솟아올랐다. 비즈니스석의 안락함을 다시 한번 느끼며, 솔직히 속으로 '여행할 때마다 이 좌석을 이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동기부여가 저절로 되는 것 같았다. 출장 때마다 스트레스와 피로에 시달리던 기억 대신, 이번엔 정말 여유롭고 쾌적하게 새로운 인생의 챕터를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뛰었다. ‘그래, 이건 시작에 불과해! 앞으로 더 많은 성취를 이뤄서, 이런 편안함과 여유를 내 일상으로 만들어야지!’라는 결심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다. '한 번 경험해 보니 돌아갈 수 없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비즈니스석에서 느낀 안락함이 마치 내 미래의 새로운 기준이 된 기분이었다.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짐을 맡길 창고로 향했고 거기서 안전하게 6개의 캐리어 중 5개를 맡길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서부턴 우리가 장기간 머물 집을 찾을 때까지 잠시 숙박할 에어비앤비 숙소로 향하는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는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엄청 오래되어 보이는 노란색의 우반(U-Bahn, 독일의 지하철)이었다. 마치 장난감처럼 귀엽기도 했지만, 동시에 타임머신을 타고 지하철이 처음 만들어졌던 때로 순간이동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노란색 외관과 퀴퀴한 지하철 특유의 냄새는 영화 속 낡은 세트장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었고, 그 안에 앉아있자니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했다. 지하철 내부는 정말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로 가득했고, 나는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대부분 조용히 독일어로 이야기하고 있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들어도 이국적인 소리만 들려왔다. 게다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보다 무표정하고 차가운 표정의 사람들이 훨씬 많아서, ‘여긴 약간 삭막한 분위기인가?’라는 생각이 스쳤다. 어딘지 모르게 암흑도시에 들어온 것 같은 묘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게 내 착각이었을까?
우반에서 내려 큰길을 따라 숙소를 찾아가던 중, 도시 자체가 묘하게 회색빛으로 물든 것처럼 느껴졌다. 시댁이 있는 아헨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고 다른 유럽의 도시들처럼 아기자기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는 전혀 없고, 차갑고 산업화된 무언가가 느껴졌다. 곳곳에 그래피티로 그려진 건물들이 있어 힙함이 조금 묻어났지만 날씨마저 흐려서 그 회색빛이 더 강조되었고, 때문에 마음도 조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한껏 낭만을 기대하고 왔던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그때였다. 갑자기 맞은편에서 한 여자가 흥얼거리며 다가오더니, 돌연 바지를 내리고 길 한복판에서 큰 볼일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왓 더...!!' 나는 그 충격적인 광경에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더 기막힌 건, 주변의 누구도 그 장면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여유롭게 걸어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멍하니 그 여자를 쳐다봤고, 옆에 있던 남편도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남편 역시 오랜만에 독일에 왔고, 특히 베를린은 처음이라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베를린의 모습인가?'라는 생각이 스치며, '혹시 우리가 괜히 온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갑자기 마음속 깊숙이 피어올랐다. 도시는 이미 우리에게 강렬한 첫인상을 남기고 있었다.
충격 속에서 가던 도중, 우리는 길모퉁이마다 서 있는 매춘부들을 발견하며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마치 도시 풍경의 일부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고, 그 광경이 나를 더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이런 곳에서 우리가 잘 살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머릿속을 스치고, 동시에 '어쩌면 이건 베를린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종종 한국을 '완벽한 스머프의 나라'라고 했는데, 그 말의 의미를 그제야 제대로 이해했다. 베를린은 정말로 '어나더 레벨'이었다. 베를린 전체가 이렇게 이상한 것인지, 특정 지역만 독특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우리가 운이 없어서 이런 장면을 목격한 것인지 당시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분명했다. 독일의 수도는 범상치 않은 기운을 지닌 도시였다. 당장에라도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여행이란 원래 예상치 못한 일들로 가득하지 않던가?'라는 생각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너무 불안하고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한편으론 이런 환경에서 살면 나 자신이 더 강해질 거라는 묘한 생각도 들었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게 또 타지생활의 묘미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미 왔고 되돌릴 수 없었기 때문에 '뭔가 정신없이 돌아가는 이 도시가 주는 에너지가 언젠가는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라는 희망회로만 돌리려고 노력했다. 베를린의 혼란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새로운 일상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