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3개월 이상 지낼 계획이었기 때문에, 베를린에서 장기간 머물 집을 구하고 거주 비자도 준비해야 했다. 한국에서는 집 구하는 게 비교적 간단하다. 마음에 드는 집이 있으면 먼저 가서 "저 이 집 할게요!" 하고 계약서 쓰고 계좌이체하면 끝. 하지만 독일에서는? 완전 다른 게임이었다. 이민자와 난민이 몰려드는 독일은 집부족 현상을 겪고 있었고, 집 구하는 일이 하늘의 별 따기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여기서는 단순히 집을 고르는 게 아니라, 마치 오디션을 보는 것 같았다. 집주인에게 세입자의 재정 상태와 신용 기록을 증명하는 서류부터, 소득이 얼마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누가 함께 살 것인지 등 온갖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한국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어쨌든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우리는 독일의 방식에 적응하기로 했다.
집 구하기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조금 더 특별하게 접근하기로 했다. 그래서 준비한 것이 바로 '우리만의 프로필'이었다. 이 프로필에는 우리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함께 우리의 '다정한 사진들'을 넣었고, 집을 얼마나 소중히 잘 사용할지에 대해 설명을 덧붙였다. 마치 면접에서 '저는 책임감 있고 긍정적인 사람입니다!'라고 어필하는 것처럼, 우리도 '이 집은 저희에게 너무나도 소중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 이렇게 우리는 집주인에게 집을 빌려주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는 느낌을 주려고 애썼다.
우리는 베를린에 완전히 눌러앉을 생각은 아니었기에, 가구가 완비된 집을 찾아야 했다. 에어비앤비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그 동네보다 더 안전하고 거주 환경이 좋은 동네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 우리는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멋진 공원, 평화로운 광장, 그리고 창의적으로 꾸며진 카페와 펍, 다양한 레스토랑들이 어우러진 '프렌츠라우어베르크'라는 매력적인 지역을 발견했다. 이곳은 세련된 감각과 편안함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며, 마치 도시의 숨겨진 보석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우리 둘 다 '여기다!' 하는 확신이 들었다.
부동산 웹사이트를 뒤져가며, 우리는 프렌츠라우어베르크의 여러 집에 방문 요청을 보냈고, 드디어 한 곳에서 '오케이' 사인을 받았다. 집을 보러 가는 날, 남편이 평소와는 완전히 다르게 정장을 차려입은 걸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평소엔 편한 티셔츠와 바지로 살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신경 쓰는 걸 보니, 이 집에 사활을 걸었다는 뜻임이 분명했다. '이 집 아니면 안 돼!'라는 눈빛을 보내며 거울 앞에서 넥타이까지 매는 그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영화 속 중요한 계약을 따내려는 사업가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우리 집 찾기 미션이 어느새 진지해진 순간이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그 집 앞에 도착했는데, 이미 우리 말고도 8명의 사람들이 줄 서 있었다. 모두 같은 목적, 바로 집을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정말 소문대로 경쟁이 치열해 보였다. '이거 뭐, 마치 인기 맛집 줄 서기 같은데?'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긴장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보러 간 집은 지상층에 위치해 있었고 (독일에서는 1층을 '지상층'이라고 부르고 2층부터 '1층'이 시작된다. 이게 처음엔 헷갈렸지만 이제는 적응 완료!), 아담한 테라스가 딸려 있었다. 방은 두 개였고, 나머지 공간도 꽤 괜찮아 보였다.
남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집주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평소에도 말이 많은 스타일이긴 했지만, 그날은 더 '환심 사기 모드'를 발동한 듯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뭐든 물어보며 친해지려고 애를 썼지만, 집주인은 좀 경계하는 눈치였다. 대화는 이어졌지만, 뭔가 긴장된 분위기. 그렇게 첫 번째 집 방문은 끝났고, 집주인은 이번 주 안에 세입자를 결정하겠다고 했다. 이때부터 독일에서 집 구하는 게 마치 직장 면접 같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소문은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경쟁이 치열할 줄이야!
그리고... 집 방문 3일 후, 드디어 집주인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런데 그 내용은 실망스럽게도 '다른 세입자를 선택했다'는 소식이었다. 낙담한 우리는 '우리가 도대체 뭐가 부족한 거지?'라는 생각에 빠졌다. 당시 남편의 연봉도 나쁘지 않았고 빚도 없었는데, 세입자를 고르는 기준이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 후에도 여러 집에 방문 요청을 보냈지만, 대다수는 연락조차 오지 않았다. 독일에서 집을 구하는 일이 이렇게 어려울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마치 오디션에 계속 떨어지는 느낌이랄까?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한 후, 우리는 더욱 철저하게 준비하기로 결심했다. 마치 전투를 준비하는 군인처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고, 우리 프로필을 보완해서 좀 더 매력적으로, 마치 '이 집에 딱 맞는 세입자'처럼 보이도록 신경을 썼다. 이제는 집 구하기도 직장 구하기처럼 철저한 전략과 준비가 필요하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
일주일이 더 지나고, 드디어 또 다른 집에서 방문해도 좋다는 연락이 왔다. 이번에도 우리는 '집 구하기 전용' 옷을 똑같이 차려입고, 약속 시간보다 30분 먼저 도착해 기다렸다. 그런데 또다시 경쟁자들이 이미 잔뜩 와 있었다. '아, 또 힘든 경쟁이 예상되네..' 하며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던 그때, 한 여성분이 입구에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건물 매니저예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집주인은 독일의 전직 아나운서라 했고, 지금은 해외에 있어서 직접 올 수 없다고 했다. 왠지 신비로운 인물인 것 같아 조금 더 궁금해지긴 했다.
건물매니저는 곧바로 3층에 위치한 아파트로 사람들을 안내했다. 그곳엔 침실 하나가 따로 있었고, 부엌에는 식기류까지 잘 갖춰져 있었다. 게다가 조용한 안뜰 쪽에 있어 한눈에 봐도 평화로워 보였다. '이건 무조건 잡아야 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나에겐 완벽했다. 두 명이 살기에 크기도, 가격도 마음에 쏙 들었다. 남편은 이번에도 '친화력 만렙'을 발동해 건물 매니저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며 신뢰를 쌓으려 애썼다. 나는 남편의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어떻게 저렇게 잘 나서지?' 하며 감탄했다.
우리는 집이 너무 마음에 든다고 솔직하게 전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매니저는 이 사실을 집주인에게 전달하고, 우리의 서류를 검토한 후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또다시 기다림의 시간이 시작됐다. 문제는 우리가 처음 예약한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지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혹시 또 다른 단기 숙소를 알아봐야 하나?'라는 불안이 슬그머니 스며들었다. 부디 좋은 소식을 기다릴 수 있기를 바라며 근처 카페에 가서 미리 동네 탐색을 했다.
집 방문 후 이틀이 지나자, 드디어 그 집주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패트릭 씨 맞으시죠?”
남편은 살짝 긴장된 목소리로, “네, 안녕하세요?”라고 대답했다.
“집 임대 관련해서 연락드렸는데요... 보신 아파트의 세입자가 되어 주시겠어요?”
이 말을 듣는 순간 남편의 얼굴은 마치 당첨 복권을 확인한 사람처럼 환해졌다.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가득 차서, “정말요? 네, 당연하죠! 감사합니다!”라며 거의 외치다시피 했다.
집주인은 웃음 섞인 목소리로, “원래 다른 의사 한 명과 고민했었는데, 보내주신 프로필을 보니 정말 좋은 사람들 같아서요.”라고 덧붙였다.
남편은 흥분을 감추며, “네! 집을 정말 소중하게, 마치 우리 집처럼 깨끗하게 사용할게요!”라고 약속했다.
“그럼 이사 날에 뵙죠!” 집주인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남편이 전화를 끊자마자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를 보며 외쳤다. “우리가 해냈어!”
순간 내 마음도 폭발할 듯 기뻤다. 나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남편에게 달려가 두 손을 마주 잡고 둘이서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아니, 취업 합격이나 시험에 붙은 것처럼! 이렇게 기뻐할 일인가 싶었지만, 그동안 마음 졸이고 고생했던 시간이 한순간에 풀리는 것 같아 너무나 홀가분했다. '우리가 해냈다!'라는 느낌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렇게 어렵다는 베를린에서 집 구하기 미션을 성공적으로 클리어하다니! 그것도 우리가 정성 들여 만든 프로필 덕분이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열심히 준비한 이력서로 합격한 기분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한 발 더 나아간 노력과 정성은 결국 결실을 맺는다는 것. 운이 좋았던 걸까? 아니면 우리의 노력이 운을 불러온 걸까? 뭣이 되었든 이 기쁨에 잠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우리가 집을 얻어 살게 된 베를린의 '프렌츠라우어베르크'는 다행히도 베를린의 충격적인 첫인상을 한결 누그러뜨려 준 지역이었다. 이곳은 마치 도심 속 작은 오아시스 같았다. 길마다 나무가 우거져 있어, 도심 한복판에서도 뭔가 숲 속에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아이들이 있는 가족들이 주로 거주하는 안전하고 평온한 동네였다. 특히 주말마다 열리는 벼룩시장은 이 지역의 활기를 잘 보여줬다. 핸드메이드 귀걸이를 구경하며 특이하고 예쁜 것을 득템 할 때마다 짜릿했고, A급 신선한 야채와 과일도 살 수 있어 좋았다. 우리는 새로운 동네를 탐험하기로 마음먹었고, 여러 식당들과 카페들을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독일 문화 속으로 스며들었다. 카페에서 일하는 걸 특히 좋아하는 남편은 금세 동네의 '단골 카페'를 찾았고, 그곳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작업하는 남편의 모습은 이제 그 카페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우리는 독일 음식을 파는 식당은 물론, 이탈리아 음식 식당에도 단골이 되며 먹방 라이프를 즐겼다. 주변에 한국 음식점이 없다는 게 조금 아쉽긴 했지만, 매운 음식을 파는 베트남 식당이 있어 '매운맛'에 대한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 한국 음식을 사려면 지하철을 타고 한참 가야 했지만, 그래도 한국 제품들을 파는 슈퍼마켓이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했다. (매운 고추장과 김치를 파는 곳은 언제나 반가운 법이니까!) 또한, 집 근처에 대형 슈퍼마켓이 바로 가까이 있어서 생활이 무척 편리했다. 매일 저녁 무엇을 해먹을지 고민하며 슈퍼를 거닐다 보면, 신선한 식재료들 덕분에 뭔가 '셰프'가 된 기분이 들곤 했다. 야채나 과일은 물론 빵 가격도 한국보다 훨씬 싼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동네 사람들은 확실히 뭔가 더 따뜻하고 친절한 느낌이었다. 처음엔 낯설고 차가운 베를린에서 조금 당황했지만, 프렌츠라우어베르크는 우리가 '여긴 살만하겠는데?'라고 느낄 수 있게 해 준 보금자리 같은 곳이었다.
한국과 달리, 베를린에서는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자전거 도로가 도시 전체에 깔끔하게 정비되어 있어 남녀노소 불문하고 출퇴근하거나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사람들까지,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를 일상적으로 이용했다. 한 번은 정장을 입은 비즈니스맨이 자전거로 출근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인상 깊었다. 환경과 건강을 생각하면 자전거를 타는 습관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고, 베를린 사람들은 마치 프로 선수처럼 자전거를 능숙하게 타는 것처럼 보였다. 나도 한 번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또한, 흥미로웠던 점은 자전거뿐만 아니라 '스트라센반(Straßen Bahn, 트램)'이라는 독특한 대중교통이었다. 처음에는 그 이름이 조금 생소했는데, 차들이 달리는 도로 위에 철도가 얇은 라인을 따라 설치된 걸 보고 독특하다고 느꼈다. 멀미 나는 버스 대신, 마치 지상에서 타는 지하철 같은 스트라센반이 훨씬 편리하게 느껴졌다. 기차처럼 쾌적한 데다가 지상을 달리니 경치도 구경할 수 있어서 금세 선호하게 되었다. 덕분에 어디든 이동할 때마다 편하게 여행하는 기분을 즐길 수 있었다.
집을 확보한 기쁨도 잠시, 이제는 거주 비자를 취득해야 하는 새로운 미션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번째 단계는 시청에 가서 집 주소를 등록하는 것이었는데, 드디어 집을 구했으니 첫 번째 체크리스트 항목은 성공적으로 완료! 이제 외국인청에서 비자 수속 예약을 해야 했는데, 이게 또 말 그대로 '성공하기 하늘의 별 따기'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방문예약을 하기 위해 웹사이트에 접속하자마자 3개월 동안 예약이 전부 꽉 차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마치 누가 내 앞에서 문을 콱 닫아버린 듯한 절망감이 몰려왔다. ‘이럴 수가!’ 내 관광 비자는 3개월 유효기간인데, 이미 독일에 도착한 지 한 달이 지나버린 상황. 남은 시간은 고작 2개월, 대체 어떻게 예약을 해야 하지?
블로그를 찾아보니, 예약 실패한 사람들은 새벽부터 외국인청 앞에서 야영을 하며 줄을 서는 일이 다반사라고 했다. 그렇게 해도 그날 된다는 보장이 없어 안 되면 다음 날 또다시 와야 한다니, 내 눈앞이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아니, 야영까지 해야 하는 것인가? 도저히 그럴 순 없지! 긍정적인 마인드를 되찾으며, 나는 비자 예약 사이트를 매일, 매시간 들어갔다. 마치 연말 콘서트 티켓팅 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일주일 후, 기적처럼 '예약 가능'이라는 메시지가 뜨는 그 순간, 심장이 두 배로 뛰기 시작했다. 이건 바로 하늘이 내게 준 선물! 지체할 시간이 없다! 나는 초능력을 발휘하듯 떨리는 손으로 즉시 클릭해서 예약을 완료했다. 그 순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남편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나에게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런 난관 속에서도 예약 접수를 해내다니, 정말 대단해!”라고 말하며 감탄했다. 그 순간, 나는 작은 승리감에 젖어 뿌듯함을 느꼈다. 마치 험난한 장애물을 피해 성공적으로 목표를 이룬 모험가처럼 말이다. 이제, 나는 한 걸음 더 독일 생활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실감했다!
내가 비자 예약을 잡는 동안, 남편은 차분하게 비자 신청에 필요한 서류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있잖아... 독일 거주 비자를 신청하려면 독일어 A1 시험을 통과해야 한대,” 남편이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뭐? A1? 그게 뭔데?” 나는 충격에 휩싸여 물었다.
“기본적인 독일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야.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 네 가지 영역을 다 봐야 해,” 남편이 슬며시 설명했다.
"오 마이갓... 독일어 너무 어려운데…”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응, 나도 방금 알았어. 미안해...” 남편이 사죄하듯 말했다.
“미안할 게 뭐 있어.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해보자! 뭐, 못할 이유도 없지!”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답했다.
그러자 남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근데… 비자 수속 예약이 두 달 후잖아. 그 사이에 시험을 볼 수 있을까?”
"아, 그러네. 시험은 언제 볼 수 있어?" 나는 상황을 체크하며 물었다.
남편은 잠시 검색하더니, 고개를 들며 말했다. “음… 베를린에서는 이미 꽉 차서 두 달 안에 시험을 못 봐. 뮌헨에서만 그 기간 안에 볼 수 있네...”
"정말 뭐 하나 쉬운 게 없네... 그럼 어쩔 수 없지, 뮌헨에서 시험 일정을 잡자. 그때까지 열심히 준비하면 되지 뭐, " 나는 결단을 내렸다.
“응, 고마워,” 남편이 안도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갑작스레 독일어와의 전쟁이 시작됐다. 나는 곧바로 서점에서 독일어 교재를 한 권 샀는데, 책을 펼치자마자 독일어의 무시무시한 본성을 깨달았다. 문장 구조도 영어랑 완전 달랐고, 복합명사 단어들은 길쭉길쭉하고, 관사는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 같았다. 한 페이지를 읽으려면 마치 사전을 통째로 외워야 하는 것 같았고, 그 긴 단어들을 발음하려다 보면 혀가 자꾸 엉켜버렸다. 처음엔 완전 패닉 상태였다. ‘아니, 이걸 어떻게 공부하지?’ 하고 말이다.
하지만 포기란 없다! 만약 독일어 시험에 붙지 못하면 남편과 떨어져 살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는 매일 같이 카페로 달려갔고, 그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6~8시간씩 독일어에 매달렸다. 듣고, 읽고, 쓰고, 말하고... 이렇게 집중해서 공부한 적이 있었나? 어느새 난 학교 다닐 때보다 훨씬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사랑의 힘이 이렇게 대단할 줄이야! 커피 한 잔에, 책 한 권을 펴고, 우리는 카페에서 서로의 눈빛을 가끔씩 교환하며 나는 시험을 준비했고 남편은 일을 했다. ‘독일어 A1 시험 찢어버리겠어!’라는 마음으로 나는 전투에 임했다. 남편도 내가 물어보는 것들에 대해서 매번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서로를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하게 만드는 힘이 참 놀라웠다. 사랑이란, 진짜 강력한 공부 비법인 것 같다. 흐흐흐
한 달 반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드디어 시험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고, 우리는 혹시 몰라 전 날 뮌헨행 비행기를 탔다. 그다음 날 시험은 아침 일찍 시작되었고, 그동안 열심히 공부한 만큼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특히 말하기 시험을 볼 때는 내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입은 바짝바짝 마르고, 눈앞에 있는 독일어 시험관이 마치 심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 시험을 마치고 나니 마치 내 다리가 젤리처럼 풀리는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림이었다. 점수는 오후 늦게 발표된다고 했고, 우리는 어딘가로 몸을 옮기긴 했지만, 마음은 온통 시험 결과에 매달려 있었다.
남편과 나는 늦은 점심을 먹으며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식당에서 음식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열심히 준비했어도 ‘혹시’라는 불안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합격선은 100점 만점 중 60점. 그 기준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시간이 점점 흐르고, 드디어 오후 4시, 시험 결과 배부가 시작되었다. 시험장에 돌아오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것이 느껴졌다. 몇몇 사람들은 이미 얼굴이 어두웠고, 점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소리치는 가족들도 있었다. 거주 비자가 걸린 문제이니 모두들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차례가 왔다. 남편이 내 시험 결과를 먼저 받아 들었다. 그런데, 그의 눈가에 갑자기 눈물이 맺히는 것이 아닌가! 심장이 덜컹 내려앉으며 불안이 엄습했다. ‘뭐지? 내가 망쳤나?’ 나는 남편의 손에서 결과지를 낚아채듯 빼앗아 바로 확인했다. 그 순간, 긴장감이 스르르 풀리며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내가 받은 점수는 무려 100점 만점 중 95점! 시험 관계자가 남편에게 다가와 “오늘 본 사람들 중에 제일 잘 봤어요, 축하해요!”라며 귀띔까지 해줬다. 내 머릿속에는 ‘진정한 노력은 배반하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 순간, 남편은 나를 꼭 안아주며 "진짜 잘했어! 너무 자랑스러워!"라고 속삭였다. 그 말이 마치 달콤한 초콜릿처럼 마음을 따뜻하게 녹였다.
나는 그렇게 시험도 성공적으로 통과했고, 남편이 손을 꼭 잡아주니 그동안의 긴장이 다 풀리는 것 같았다. 집도 기적처럼 제때 구했고, 독일어 시험도 기대 이상으로 잘 본 덕분에, 나는 어렵지 않게 거주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며, 이제야 진정으로 편한 마음으로 독일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이 짧다면 짧았지만 결코 쉽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많은 도전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우리가 노력해 온 시간이 떠올랐다.
우리는 그날 저녁, 뮌헨의 어느 작은 밀맥주집에서 생맥주 한 잔씩을 들이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에게 불가능한 건 없겠지!" 하지만 그 말 뒤에는 단순한 안도의 숨결만이 아닌, 함께 견뎌낸 불안에 대한 깊은 다짐이 서려 있었다. 인생의 큰 변화 앞에서 우리는 종종 불안했고, 불확실성 속에서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힘겨운 순간마다 손을 놓지 않았기에 지금의 이 승리를 만끽할 수 있었다. 우리는 실패의 가능성에도 최선을 다했고,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용기를 선택했다.
비록 지금은 모든 것이 잘 풀렸지만, 앞으로 또 어떤 도전이 기다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의 강인함은 어려운 순간을 피하는 데 있지 않고, 그것을 마주하고 헤쳐 나가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건 없다"는 우리의 외침은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과 앞으로의 결심을 다짐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날 저녁 밀맥주집에서 우리는 비장하게 서로를 마주 보며 앞으로 어떤 길이 펼쳐지든, 우리는 함께 헤쳐나갈 것이라 믿었다. 이 작은 승리가 일시적인 만족이 아닌, 다가올 모든 도전에 대한 약속임을 느꼈다. 그렇게 우리의 새로운 삶은, 결코 후퇴하지 않는 두 사람의 굳은 결심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