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드디어 펜션 인력 세팅을 마치고 독일로 향했고 6개월 동안 쾰른이라는 도시에서 머물기로 결정했다. 살 곳으로 쾰른으로 결정한 배경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남편이 이미 쾰른에서의 생활을 경험한 바가 있었고 좋은 기억들이 많아 빠른 시간내에 잘 적응할 것으로 예상했다. 둘째, 시부모님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어 시부모님을 언제든 찾아뵐 수 있었다. 셋째, 남편의 친한 친구들이 쾰른에 거주하고 있어 사회적 연결망을 유지하며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넷째, 대도시라 없는게 없고 큰 아시아마켓도 있어 우리 같은 국제 부부가 살기에 불편함이 없을 것 같았다. 따라서 쾰른은 우리에게 안정감과 편안함을 제공할 수 있는 최적의 선택지였다. 그렇지만 이상적인 도시를 선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쾰른에서 집을 구하는 일은 얼마나 어려울까?"라는 걱정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았다. 독일의 주택난은 이미 익히 알고 있었고, 집을 구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다는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독일로 떠나기 전부터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적당한 집을 찾으려는 과정은 생각보다 긴장감 넘쳤다. 중개 웹사이트를 통해 사진으로만 집 내부를 둘러보고, 집주인들에게 연락했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한 곳에서 화상 통화로 인터뷰를 진행하자고 연락이 왔다. 화상통화를 할 때는 정말 직업 인터뷰를 하듯 떨렸다. 30분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억지 미소를 계속 짓느라 입 근육이 다 아팠다. 그래도 운 좋게도 그 집주인들이 우리를 마음에 들어했고 마침내 입주 승인을 해주겠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드디어!"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6개월 단기 임대로 집을 구했기에 월세가 꽤 비쌌다. 하지만 가구가 완비된 집을 찾는 것이 우선이었고, 도심 속에서 적절한 집을 구한 것만으로도 큰 행운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치고 우리는 쾰른으로 향했다. 길게 이어진 비행과 낯선 공항의 풍경을 지나 머물 집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마치 작은 승리를 거둔 듯한 기분이었다. 새로운 도시, 새로운 시작. 쾰른은 이제 우리의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될 무대였다. 새로운 도시에서의 첫 시작은 늘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는 법. 쾰른에서의 첫 몇 달은 그런 감정들이 뒤섞인, 하지만 매일이 흥미로웠던 시기였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여전히 진행 중이었지만, 쾰른은 우리에게 많은 발견과 즐거움을 선사했다. 종종 맑은 바람을 맞으며 라인강 을 따라 걷는 것은 우리의 작은 의식처럼 되었다. 강변에 서면 도시의 소음은 멀어지고, 탁 트인 전경과 물살의 잔잔한 흐름이 마음을 차분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강 위로 부드럽게 스쳐 가는 바람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우리를 반겨주었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물결은 한숨과 함께 묵은 걱정을 실어 보내는 듯했다. 때로는 강을 따라 산책하다가 벤치에 앉아 멍하니 물결을 바라보곤 했다. 물 위를 떠다니는 배들과 그 뒤를 따르는 잔물결은 단순하지만 묘한 매력을 주었다. 그곳에서는 묘하게도 걱정이 더 이상 무겁지 않게 느껴졌다. 강물과 함께 흘러가는 듯한 느낌,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풍경은 우리가 가진 작은 고민들을 더 넓은 시야로 바라보게 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모이는 실내 공간을 피하고, 음식점이나 카페를 갈 때도 항상 야외 좌석이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다행히 쾰른에는 야외 좌석이 잘 마련된 멋진 장소들이 많았고, 가을 햇살 아래 앉아 커피 한 잔을 즐기며 도시의 풍경을 감상하는 일은 큰 행복이었다. 테이블 주변을 가로지르며 종종 놀러 오는 참새들까지도 우리의 일상에 작은 재미를 더해줬다.
무엇보다 우리를 사로잡은 건 쾰른의 넓고 아름다운 공원들이었다. 집 근처 공원에서 매일 산책을 하며 우리는 답답함 없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와 함께 걷는 길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특히, 이례적으로 맑은 날씨가 많아 가을의 풍경을 더욱 빛내주었다.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울긋불긋한 나뭇잎들과 잔디밭, 그리고 그 위를 신나게 뛰어다니는 반려견들의 모습은 우리의 하루를 활기차게 만들어 주었다.
어느 날은 공원의 연못가에서 오리가족을 만났다. 어미 오리가 새끼들을 데리고 유유히 헤엄치는 모습은 자연이 주는 가장 평화로운 장면이었다. 우리는 종종 오리떼에게 빵 조각을 조금 던져주며 그들에게 먹이를 주었고, 그런 사소한 행동 하나가 쌓여 코로나19의 적막함을 견디는 데 큰 힘이 되었다. 가끔 오리들 사이에서 먹이를 놓고 벌어지는 소소한 실랑이를 보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었다.
쾰른의 일상은 그저 새로운 장소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매일의 작은 발견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시간이었다. 야외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반려견들과 뛰노는 주인들의 생기, 그리고 공원의 자연과 교감하는 순간들은 우리를 이 도시에 한층 더 깊이 스며들게 했다. 맑은 가을 날씨 덕분에 우리는 마치 쾰른이 보내는 환영 인사를 받는 것 같았다. "이 도시에서의 하루하루가 소중하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의 첫 가을은 특별하고 아름다웠다.
쾰른에서의 생활은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했던 시간은 나이드신 시부모님과 함께 보낸 날들이었다. 쾰른이 가까운 거리였던 덕분에 우리는 종종 시부모님을 초대해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시부모님과 아주버님을 아침 식사를 위해 우리 집으로 초대했다. 아침 식사로 갓 구운 빵과 독일식 햄, 잼, 치즈, 삶은 계란 그리고 따뜻한 커피가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같이 식사를 하는 동안 여러 이야기를 하며 다들 즐거워하는 모습에 나도 흐뭇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남편과 내가 항상 걷던 쾰른의 넓고 아름다운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가을 햇살 아래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느긋하게 걷는 동안, 시부모님과 남편은 옛 이야기를 꺼내며 웃음꽃을 피웠다. 공원 산책 후, 우리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쾰른의 랜드마크인 쾰른 대성당(Kölner Dom)과 구시가지의 매력을 함께 즐겼다.
그러나 항상 웃을 수 만은 없었다. 남편과 시어머니는 종종 생각이 달라 서로 의견을 주고받다 가끔 다툼으로 번지기도 했다. 재미있는 점은 모자 간의 갈등으로 인해 고부 갈등이 생길 틈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갈등의 순간마다 나는 되지도 않는 독일어와 손짓발짓으로 중재에 나섰다. 그럴때마다 나는 남편보단 시어머니편을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이유는 단순히 남편이 더 설득하기 쉬워서다. 당시에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어떻게든 화해를 이끌어내려 애썼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순간이 사람 사는 모습의 자연스러운 일부였던 것 같다. 가족이란 때로는 의견이 충돌하고, 감정이 격해지기도 하지만, 결국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끝에 더 가까워지는 존재라는 것을 느낀다. (그렇지 않은 가족도 있지만..) 그런 날들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그때의 사소한 다툼마저도 미소 짓게 되는 추억이 되었다. 남편은 나를 만나면서 날카로운 모서리가 점차 사라졌고, 한결 더 부드럽고 온화한 둥근 사람이 되었다. 생각이 다른 만큼 서로에게 배울 것도 많았던 시간들. 서로 다른 마음들이 모여 만들어가는 가족이라는 풍경은, 이렇게 조금씩 더 다채로워져 갔다.
특별한 하루를 보내고 싶었던 또 다른 날, 우리는 함께 아르탈(AhrTal)로 소풍을 떠났다. 아르탈은 독일의 대표적인 와인 생산 지역 중 하나로, 특히 가을철에는 형형색색으로 물든 와인나무들이 장관을 이루는 곳이었다. 이곳은 작은 강인 아르(Ahr)가 흐르는 계곡을 따라 펼쳐진 언덕과 포도밭으로 유명하며, 독일에서 가장 작은 와인 생산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언덕에 빼곡히 심어진 와인나무들이 만들어내는 알록달록한 풍경에 매료되었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으로 물든 포도밭은 자연이 그린 거대한 캔버스 같았다. 와인 언덕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며 시부모님은 끊임없이 감탄하셨다.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있니?”라는 물음에 나는 "저도 처음인데 너무 예쁘네요!" 하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전망대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아르탈 계곡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발아래로 펼쳐진 작은 마을과 굽이굽이 이어지는 강,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가득 메운 와인밭의 풍경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산책을 마친 후에는 지역 와인하우스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이곳에서 아르탈의 대표적인 레드 와인을 한 잔씩 마시며, 시부모님은 “이게 바로 독일의 맛이지.”라며 유쾌하게 말씀하셨다. 따뜻한 와인하우스의 분위기와 맛있는 독일식 요리는 모두를 더욱 행복하게 만들었다. 쾰른과 아르탈에서 함께 보낸 시간은 단순한 일상을 넘어 특별한 추억으로 남았다. 시부모님과의 시간은 우리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동안 큰 위안이 되었고, 이곳에서의 생활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자 독일의 날씨가 본격적으로 민낯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회색 하늘, 차가운 바람, 그리고 매일같이 내리는 부슬비는 독일의 겨울을 실감나게 했다. 베를린 이후로 우리는 독일의 하늘이 그저 회색일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겨울이어서 그런지, 모든 것이 더 회색으로 보였다. 밝은 회색, 중간 회색, 짙은 회색, 검은 회색...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라는 표현이 이곳의 날씨를 두고 하는 말인 듯했다. 어떻게 한 나라에 이렇게 다양한 회색이 존재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커튼을 열면 회색 하늘이 드리워져 있어 한숨이 절로 나왔고, 오후 4시 30분쯤에는 일찍 해가 지기 시작해 더욱 어두워졌다. 날씨에 민감한 나와 남편은 이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비가 거의 매일 내리다 보니, 공원으로의 산책도 어려워졌다. 12월이 되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전혀 없었고, 크리스마스 마켓도 열리지 않았다. 공원을 산책하며 반려견들을 보는 것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는데, 이마저도 불가능해지니 우리는 무료하고 무기력해졌다. 그리고 1월과 2월, 날씨가 가장 나쁜 시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매일같이 기분이 가라앉았고, 남편이 이전에 왜 독일을 떠나 무더운 태국으로 갔는지 이해가 되었다. 또한 우리는 밝고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에 익숙했지만, 독일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보통 미소를 지어보이지 않았다. 날씨가 큰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남편은 자신이 독일에서 이방인처럼 느껴진다고 했고, 독일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매일 들쑥날쑥한 온도 변화로 인해 남편은 7년 만에 처음으로 감기에 걸렸고, 많이 우울해 보였다. 코로나19 검사는 다행히 음성이었지만, 일주일 넘게 고생한 남편이 안쓰러웠다. 남편은 독일로 돌아온 결정을 자책하며, 독일로 온 선택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불난 집에 부채질 하듯 새직장도 남편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마케팅 부서를 설립하고 영업팀의 리드를 창출하는 업무는 한계에 부딪혔고, 지인의 동업자였던 회사 CEO와의 의견 충돌이 큰 장애물이 되었다. 이 CEO는 세일즈 출신으로 마케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나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며, 남편과의 긴장감은 점점 고조되었다. 서로의 견해를 좁히기 위한 에너지와 시간이 낭비되었고, 성격상의 불일치도 문제를 악화시켰다. 결국, 남편은 상황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CEO와 직접적으로 솔직한 대화를 시도했다. 대화 끝에 서로의 요구와 기대가 너무 달라 앞으로 나아가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합의하게 되었다. 나는 남편이 또 다시 억지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하는 상황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이 결정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 그의 결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이전 회사에서의 불명예스러운 경험 이후, 이러한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던 나는 남편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었다. 그에게 힘을 주려 나는 조심스럽게 안부를 물었다.
“남편 괜찮아?”
“응, 나 너무 괜찮아.” 라고 남편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가 뭐 해줄게 있을까?” 라고 내가 다시 물었다.
“아니 고마워. 근데 진짜 괜찮아.. 나 또 잊고 있었어. 날 행복하지 않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라고 남편이 말했다.
“그게 뭔데?”라고 내가 다시 물었다.
“한 회사의 직원이 되어 다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거! 다른 사람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추고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고 설명해야 하는 삶은 이제 지긋지긋해졌어.”라고 남편이 말했다.
“그렇네. 그건 우리가 바라는 삶이 아니었지.”라고 내가 말했다.
“난 앞으로 절대 그런 삶으로 돌아가지 않을거야.”라고 남편이 단호히 말했다.
“응, 나도 당신 덕분에 펜션 완성할 수 있었고 자유로워 졌잖아. 나도 당신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으면 좋겠어. 난 당신 믿어.”라고 내가 말했다.
“고마워. 나도 그래야 할 것 같아.”라고 남편이 희망의 눈빛을 보내며 나에게 말했다.
안타깝게도 새로운 회사에서의 결말은 이렇게 되었지만 남편은 이런 상황을 빨리 받아들이고 새롭게 도약할 채비를 하였다. 남편은 일적으로 자립해야겠다는 의지를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더이상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회사 계약 해지 후, 남편은 살고 있던 집주인에게 연락하여 특별한 사정으로 인해 임대차 계약을 한달 더 일찍 해지할 수 있는지 물어봤고 집주인은 다행히 그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겨울의 끝자락에 독일을 떠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