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영은 어느 시골마을의 자그마한 은행창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 시골마을에는 그 규모에 어울리지 않게 서울에 본사가 있는 자그마한 회사의 지사가 있었다. 그 지사에 근무하는 상훈이라는 직원이 자주 그 은행에 방문하여 대출연장이나 급여이체신청과 같은 회사의 일을 처리하곤 했다.
상훈은 언제부터인지 은행에 방문할 때면 커피를 하나씩 가져오기 시작했다. 키도 조금 작았고, 얼굴도 그리 잘생겼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시골에서 보기 힘든 뽀얀 얼굴에, 하얀 손, 그리고 서류에 서명할 때 보았던 얇고 가느다란 손가락, 그리고 정갈한 서울말씨와 엷은 미소가 매력적이었다. 은영도 언제부터인지 상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은영씨, 오늘은 퇴근하고 뭐해요?"
"뭐 하긴요.. 집에 가야죠"
"제가 회사 일로 며칠전에 옆 마을에서 낙지전골을 먹었는데.. 너무 맛있어서요.."
"그래서요?"
"날씨도 추워지는데, 우리 같이 저녁이나 먹어요"
"......"
"빼지 마시고.... 네?"
"알았어요.. 저 6시 30분에 일이 끝나요."
"그 시간에 이 앞에 차를 대놓고 있을게요."
그렇게 둘은 퇴근 후에 만나 상훈의 차로 옆 마을로 가서 밥을 같이 먹는 사이가 되었다. 작은 시골마을이라 보는 눈이 많아 상훈과 은영은 옆 마을에서 데이트를 해야 했다.
처음에는 밥만 먹다가, 그 다음에는 식탁에 술이 놓였다. 시골이라 대리기사가 없을 날이 많았다. 마을로 돌아갈 수 없는 날에는, 자그마한 모텔에 쉬어야 했다.
은영과 상훈이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은영의 눈에는 상훈이 정말 효자로 보였다. 상훈은 매주 꼬박꼬박 부모님을 뵈러 서울에 올라갔다.
"상훈씨는 왜 그렇게 자주 서울에 올라가요?"
"은영씨 너무 미안해요, 부모님이 많이 편찮으셔서 그래요"
은영은 그의 말을 그렇게 믿었다.
또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상훈은 자기랑 같이 밥을 먹다가도 전화벨이 울리면 깜짝 놀라면서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가서 한참 동안 통화를 하다가 들어오곤 했다는 것이다. '회사에 급한 일이 있었다'라거나 '부모님이 갑자기 어디가 불편하시다고 하셨다'라고 해서 더 묻지 않았다. 굳이 캐묻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은영은 상훈에게 자기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가자고 해도 상훈은 한사코 이를 꺼렸다. 한편으로 은영은 몸이 불편하다는 상훈의 부모님을 찾아 뵙고 싶었지만 상훈은 그마저도 안된다고 했다. 은영은 그럴 때마다 불길한 느낌이 들곤 했다.
그런데 최근에 상훈으로부터 며칠간 연락도 없었고, 은영이 전화를 해도 상훈이 받지 않아 은영은 '상훈에게 무슨 일이 있나?'라고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영은 엄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서울가정법원에서 등기우편이 왔다는 것이었다. 은영은 집에서 '소장'이라는 제목의 서류를 읽어보고 너무너무 놀라서, 앉은 채로 제대로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가슴을 움켜쥔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머, 애, 은영아, 너 왜그래?"
거실에 있던 은영엄마가 다급하게 은영을 불렀다.
"엄마, 나 물 좀 줘."
은영은 물을 두 컵이나 마시고도,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눈앞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만 주말마다 '부모님이 편찮으셔서요'라면서 서울에 올라가던 상훈의 뽀얀 얼굴이 스쳐갔다.
원고 란에는 수미라는 처음 보는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고, 피고 란에는 상훈과 자기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있었다. 그리고 청구취지에는 '원고와 피고 상훈은 이혼한다. 피고 은영과 피고 상훈은 공동하여 원고에게 위자료 2,000만 원을 지급하라'라고 적혀있었다.
청구원인에는 수미는 상훈과 혼인신고를 마친 법률상의 배우자인데, 상훈이 은영과 부정행위를 했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은영은 비로소 지금까지 애써 정상적인 것이라고 믿어왔던 상훈의 이상한 행동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상훈에 대한 배신감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상훈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받지 않았다. 다시 전화를 했다. 또 받지 않았다. 그 다음에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은영은 떨리는 손으로 '소장을 받았는데 어떻게 된 일이에요?'라는 문자를 보냈다.
한참 후에 '미안해요. 제가 은영씨에게 거짓말을 많이 했습니다. 유부남이라는 걸 말씀드리지 못해서 너무 죄송했습니다.'라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전화 좀 받아봐요'
은영은 상훈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숫자 '1'은 없어졌다. 그러나 상훈은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았다.
-1-
은영은 은행에서도, 그리고 집에서도 아주 멀리 있는 거창읍에 있는 법무사 사무실을 찾아갔다.
거창읍으로 가는 버스안. 창밖의 농촌 풍경은 여유로왔다.
너른 황토밭, 군데 군데 자라고 있는 푸른 줄기의 대파와 마늘, 버스 문이 열릴 때마다 버스 안으로 스며드는 거름의 향내는 지금까지와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은영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상훈에 대한 분노와 자신의 경솔함이 밀려왔다.
법무사 사무실에는 은영 또래의 여직원이 앉아 있었다.
눈밑으로 주근깨가 촘촘히 박혀있던 그 여직원이 자리에 앉아서 은영을 바라보았다.
"상담할 게 있어서..."
소장이 담긴 봉투를 내미는 은영의 손은 잘게 떨렸다. 또래 여성에게 자신의 부끄러운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은 수치심이 밀려왔다.
"어떻게 도와드려요?"
그 여직원의 말은 무척 담담했다. 은영은 마치 은행창구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저는 상훈이 유부남인 걸 몰랐거든요. 그런 내용을 담아서, 법원에 제출하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은영의 말을 들은 여직원은 키보드를 두드렸다. 여직원은 입꼬리를 한 쪽으로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여직원의 표정이 은영의 가슴에 오래 남았다.
-2-
그로부터 한 달 가량이 지난 후 은영은 법원의 변론기일 '소환장'을 받았다. 소환장 말미에는 가사소송법 제66조의 규정에 따라 법정에 출석하지 아니하면 5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다고 기재되어 있었다.
소환장을 받은 날. 은영은 법정에 가면 수미를 마주칠까 겁이 났다. 머리채라도 잡히는 게 아닐까 두려웠다. 은영은 법정에 출석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소환장에 기재된 것처럼 혹시라도 과태료를 부과받을까봐 겁이 났다. 은영은 어쩔 수 없이 하루 휴가를 내고 서울까지 올라가야 했다. 소문이 날까 두려워 은행에는 몸이 아파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가야한다는 핑계를 댔다.
법정의 분위기는 TV나 영화에서 봤던 것과 너무 달랐다. 은영은 서울이라는 이름에 더하여 법원이라는 분위기에 다시 한 번 압도되었다. 그런데 법정에는 상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은영은 어떤 눈길 하나가 자신을 주시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법정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법정 높은 곳에는 하얀 얼굴에 굵은 웨이브가 진 단정한 단발머리의 여자 판사가 앉아있었다.
그 판사는 수미, 상훈, 그리고 은영이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그런데 원고석에는 수미가 아닌 어떤 남자가 서있었고, 피고석 은영의 옆자리에는 상훈이 아닌 어떤 여자가 서있었다. 수미를 차마 볼 자신이 없었던 은영은 한편으로는 안도하면서, 상훈을 보면 따지고 싶었던 게 많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웠다.
판사는 둘에 대해 모두 변호사라고 불렀다. '아, 수미와 상훈은 모두 변호사를 선임했구나' 은영은 이 자리에 혼자 남겨진 사람처럼 느껴졌다.
원고석의 변호사가 법대 위의 판사에게 먼저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원고는 피고 상훈과 합의하여 상훈과 혼인관계를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이 사건 소 중 상훈에 대한 부분은 취하하고, 은영에 대한 부분만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은영의 옆자리에 서 있던 상훈 측의 여자변호사도 원고 변호사의 말에 화답하듯 짧게 한마디를 마치고는 자리에 앉았다.
"피고 상훈도 원고의 소취하에 동의합니다."
은영은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이 자리에 왜 자신만 남아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판사는 변호사들을 바라보았다.
"네.. 알겠습니다.. 그러면 원고와 피고 상훈부분은 원고의 소취하로 종결된 것으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원고측 변호사를 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그러면 원고와 피고 은영에 대한 부분만 남네요.. 그런데 변호사님도 아시다시피 가사소송법에 의하면, 이혼을 원인으로 한 손해배상사건만 가정법원 관할입니다. 이혼부분이 취하된 이상 이 사건은 일반 민사사건이 되어버렸네요. 이 사건을 일반 법원으로 이송하도록 하겠습니다."
원고 측 변호사는 미리 예상했었다는 듯, 판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판사에게 요구사항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사건 진행의 편의를 위하여 이 사건을 원고의 주소지를 관할하는 서울동부지법으로 이송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판사는 그때서야 비로소, 피고석에서 멍하니 앉아있던 은영을 바라보았다.
"피고 은영씨? 여기까지는 어떻게 오셨어요?"
은영은 판사를 향해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저요?'물었다. 판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버스 타고.... 왔습니다."라고 말을 마쳤다.
판사는 다시 원고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원고 변호사님 사정은 알겠는데, 서울에서 재판을 하면 피고가 응소하기 너무 어려워 보이네요. 변호사님은 영상재판을 신청하시면 되니까 이 사건을 피고 주소지를 관할하는..."
판사가 잠시 말을 멈추고,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피고 은영의 주소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원고 변호사님, 그리 피고 은영씨.. 이 사건을 피고의 주소지를 창원지방법원 거창지원으로 이송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원고 변호사님께서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재판을 마치겠습니다."
은영이 계속 멍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자, 법정 경위가 다가와 설명을 해주었다.
"오늘은 집으로 돌아가시면 되구요, 다음에는 거창지원에서 통지를 해줄 거예요."
거창지원에서는 변론기일 '통지서'를 보내주었다. 소환장과 통지서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몰랐지만, 저번처럼 멍하니 앉아만 있다오면 안 될 것 같아 법원 앞 변호사 사무실에 가서, 선임계약서를 작성한 후, 상훈과 주고받은 메시지 화면을 전부 캡처해서 건네주었다. 변호사는 메시지를 쓰윽 훑어보더니 해볼만 하다고 했다.
은영은 변호사의 응원을 받으면서, 법원에 출석했다.
거창지원의 법정에는 얼굴이 상훈보다 더 하얗고, 이목구비도 뚜렷한 남자판사가 있었고, 서울에서 봤던 원고측 변호사는 법정 내에 설치된 큰 TV화면 안에 있었다.
원고측 변호사는 화면 속에서 입을 열었다.
"재판장님, 피고는 상훈이 배우자가 있다는 사정을 알았거나 최소한 배우자가 있으리라는 사정을 알면서, 상훈과 지속적으로 만났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원고의 청구를 인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은영의 변호사는 은영과 상훈이 주고받은 문자메시지를 캡처한 사진을 증거로 제출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문자메시지를 보시면, 상훈은 평일에도 서울에 올라갈 일이 있으면, '본사에 일이 있다', '아버지가 찾으신다', '어머니가 아프시다'는 등의 문자를 보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말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상훈이 보낸 마지막 문자메시지를 주의 깊게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상훈은 은영에게 거짓말을 많이 했고, 유부남이라는 걸 말하지 않은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은영으로서는 상훈이 결혼을 했다는 사정을 전혀 몰랐고, 알 수 있는 사정도 없었습니다."
은영의 변호사가 잠시 숨을 골랐다.
"다음으로, 피고의 원고에 대한 채무는 상훈과 부진정연대채무의 관계에 있습니다. 만일 원고가 상훈과 혼인을 유지하기로 합의하면서, 부정행위에 대한 위자료 명목의 돈을 지급받은 것이 있다면, 피고의 책임도 그 범위에서 소멸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은 점도 참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은영의 변호사가 긴 변론을 마쳤다. 은영은 이 사건 재판에서 처음으로 '나를 위해 싸워주는 사람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판사는, 화면속의 원고 변호사를 향해 물었다.
"피고가 상훈이 유부남이라는 사정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할 만한 다른 증거가 있나요?"
"은영으로서는 의심할 만한 정황이 수 없이 많이 있었다는 말씀만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판사는 재판을 마치겠다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뭔가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원고 변호사에게 슬쩍 물었다.
"그런데 변호사님, 상훈이 원고와 혼인을 계속하기로 합의하면서 원고 측에 특별히 지급한 게 있나요?"
원고 변호사는 화면에서 '나가기'를 클릭하려다가 판사의 갑작스런 질문을 받고 당황했다.
"아, 상훈 부모님이 상훈이 바람피운 것에 대해 대신 사과하신다고 하시면서 5,000만원을 주셔서, 원고가 상훈에 대한 소를 취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판사는 속으로만 웃으면서 2주후에 판결을 선고하겠다면서, 법정을 빠져 나갔다. 원고 변호사가 화면 바깥에서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했다는 걸 깨달은 듯 머리를 쥐어뜯는 소리가 들렸다.
2주후 판결이 선고되었다. 은영은 변호사의 조언에 따라 굳이 법정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판결이 선고되는 법정에는 아무도 없었다. 판사만 법정에 들어와 법정을 쓰윽 보면서 자리에 앉아 주문을 읽었다.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
원고와 피고에게 송달된 판결문의 이유는 간단했다. '피고가 상훈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점을 인정할 아무런 증거가 없다. 설령 달리 보더라도, 상훈이 원고에게 위자료를 전부 지급한 것으로 보이는 이상 피고의 손해배상책임도 소멸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판결문을 받은 날에도, 은영은 창구에 앉아 있었다. 상훈은 다시는 은행에 오지 않았고, 따로 연락을 하지도 않았다. 상훈이 다니던 회사에서는 다른 직원을 보냈다.
세월이 조금 더 흐른 어느 날, 바람결처럼 상훈의 이혼 소식이 스쳐 지나갔다. 은영은 이제 남의 일인 듯 덤덤히 그 소식을 흘려보냈다.
은영은 나중에 변호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수미는 서울가정법원 재판 때도, 거창지원 재판 때도 늘 변호사 뒤편에 앉아 있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날, 은영은 등 뒤로 차가운 기운이 스치는 것을 느꼈다.
은영에 대한 소문도 잠깐 돌다가 곧 사라졌다.
커피를 건네던 손을 떠올리면 아직도 마음이 쓰리지만, 은영도 이제는 알고 있다.
세상에는 사랑보다 먼저 확인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