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렴 어때, 태어난 이유도 없는데
브런치에 글 몇 개 올렸다고 벌써 슬럼프가 왔다. 기가 차서 웃음이 난다.
원래는 1월 말에 단편소설 쓰기 강의를 들으려 했다. 그런데 수강 인원이 부족해 폐강됐단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앞길이 가로막히는 기분. 정말 끝내주는 2026년의 시작이다.
혼자서라도 써보려 노트북을 열지만, 한국인 특유의 지독한 완벽주의와 끝없는 자기검열이라는 암초에 부딪혀 배가 나아가지 않는다. 하루 딱 천 자만 쓰자고 다짐했는데, 그 천 자가 몸무게보다 무겁게 느껴져 자꾸만 멈춰 서게 된다.
그래서 나는 게임을 켰다! 와!
온라인 게임은 하지 않는다. 엔딩이 확실한 게임을 스팀에서 골라 결제한다. 애초에 타인과 비교하며 줄 세우기 당하는 게 지긋지긋해서 게임을 시작한 거니까. 끝없는 세계는 내 인생을 영원히 방치하게 만들 것 같아 두렵기도 하다.
그렇게 현실의 내가 지칠 때마다 게임을 켰다. 나는 이름 없는 무사가 되고, 사이비 교주가 되고, 농부가, 영주가, 탐험가가 되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현실은 어떻게 되든 상관 없어졌다.
뭔가를 써야 한다는 압박도, 한 권의 책을 남기겠다는 소망도, 누군가를 감동시킨다는 다짐도. 그런 것들은 전부 전생의 일처럼 희미해졌다. 내가 정한 두 번째 이름인 필명으로 불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더 이상 나로 존재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레벨도 안 오르고, 골드도 안 모이고, 인기도 없는 칙칙한 현생 따위 아무렴 어때.
하루하루 병이 깊어지는 몸뚱이도 게임 속에서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액정 속의 내가 진짜 나일지도 모른다는, 그 달콤한 무중력 상태를 끝없이 유영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어느덧 화면엔 엔딩롤이 올라왔다. 내가 대신해서 온갖 고생을 다해줬는데. 그 대가로 영웅으로 거듭난 주인공은 은혜도 모르고 나를 뻥 차버렸다. 그리고 어김없이 친구, 연인 혹은 가족의 손을 잡고 빛나는 저편으로 떠난다.
날 두고 가지 마…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져 보지만, 누구 한 명도 뒤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결국 나는 무릎 냄새를 맡으며 울며 현실로 돌아온다. 쓰다 만 글과 병든 몸이 나를 반긴다.
잘 다녀왔어! 자, 두 눈 똑똑히 뜨고 보렴. 이게 네 진짜 현실이란다.
상담 선생님은 이 멍청한 쳇바퀴에서 제발 그만 나오라고 부드럽게 돌려 말하셨다.
나도 안다. 이게 도피이자 핑계이며 비겁함이라는 걸.
하지만 또 안다. 아마 나는 언젠가 또 이 굴레 속으로 기쁘게 기어 들어갈 것을. 얼간이 같지만 나는 힘들면 어리석기 위해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종류의 인간이라 별 수가 없다.
그래도 오늘은 게임을 끄고 이 글을 썼다.
선생님, 보셨어요? 약속 지켰어요. 오늘은 게임 키 대신 한글 자판을 두드렸어요.
내일은 글쎄, 모르겠지만요.
게임을 끄면 환자가 남는다. 그래도 가끔, 글을 쓰는 사람도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