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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회귀 May 23. 2023

곰돌이와 대치 중

100% 지는 싸움

같은 공간 다른 시선




베트남 위즐 커피가 딱 한 번 내려마실 만큼 남아있다. 벌써 3개월째 개봉된 상태라 '오래 두면 안 되겠다.' 하면서도 마시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미뤄두고 있었는데, 오늘이 딱 1잔의 마지막 커피를 마실 타이밍이다. 커피핀에 원두를 탈탈 털어 넣고 프레스판을 돌린다. 매번 프레스판을 너무 많이 돌려서 커피를 추출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기에 이번에는 살짝만 돌리고 열수를 조금 부어 뜸을 들인 후 열수를 충분히 붓고 뚜껑을 덮는데 추출이 시원하다. 이번엔 너무 가볍게 프레스판을 돌렸나 보다. 옅은 커피가 예상되지만 굳이 밀크티로 마시고 싶다.


옅은 밀크티를 들고 서재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tea처럼 오랜 시간 마실 음료가 아니기에 좋아하는 창가 자리 대신 오랜만에 책꽂이 앞 좌식 의자에 앉아본다. 창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날씨가 참 좋다. 분명 미세먼지 수치가 좋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모든 창문을 닫아 둔 상태인데 머쓱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하니 '122나쁨'이 맞다. 실내에서 여유롭게 흘러가는 구름과 파스텔느낌의 하늘을 보고 있자니 '바깥세상의 답답함은 모르겠다.' 하며 고개를 숙이는데 눈이 마주친다.


한 때 한여름에 테디베어 만들기에 빠져 한 땀 한 땀 정성으로 땀방울과 함께 곰돌이를 만들었었다. 그때 만들었던 곰돌이들은 내 공간 구석구석 다양한 크기와 모습을 하고 존재한다. 나와 눈이 마주친 이 아이는 창가자리에 앉을 때는 쓰담쓰담 역할이었는데, 이곳에 앉으니 완전 정면으로 대치하는 구도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더없이 편안한 자세를 하고는 나를 뚫어져라 본다.


'불자의 마음 상태에 따라 부처님의 표정이 달라 보인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곰돌이 표정이 딱 그렇다. 어떨 때는 너무 풀이 죽은 표정이라 안쓰러워 눈물이 핑 돌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매서운 눈초리로 하많하않 나를 꾹 참아주며 볼 때도 있다. 오늘은 무념무상 무덤덤하게 온몸에 힘을 쫙 빼고 나를 응시한다.


나도 피하지 않고 눈을 응시한다. 상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흔들림 없는 평온한 여유로움은 이미 시작하기 전부터 승자다. 나는 열심히 도전을 외쳤으나 상대는 관심도 없다. 싸움 자체를 인식하지 않고 있는 승자를 보며 패자만 용쓰며 안간힘이다. 시작부터 진다는 것을 알아도 무모한 시간낭비를 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 네가 이겼다.' 하며 비워진 잔을 들고 일어선다. 홍차를 준비하고 늘 앉던 자리로 가서 쓰담쓰담해 줄 차례다.


미세먼지 수치가 조금 좋아졌다. 여전히 '99나쁨'이긴 하지만 창문을 닫아두기에는 날씨가 너무 좋다. 문을 활짝 여니 따뜻한 듯 시원한 바람이 온 실내를 채운다. 초록이들이 하늘하늘 살랑거리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 그냥 다 됐다.




아무도 관심 없는 싸움이지만, 승복도 화해도 잘하는 하루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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