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 먹이를 주다가 티켓이 눈에 들어온다. 작년 여름 땀을 뻘뻘 흘리며 오르막길을 걸어 찾아갔던 티보에렘 전시회의 티켓 2장이다. 티켓 가운데에는 몽당연필 1자루가 꽂혀있고, 연필 끝 캡슐 속에 씨앗이 있다. 2장의 티켓 디자인이 다르다며 친구 티켓에 눈독을 들이니 친구가 연필만 챙기고 티켓은 내 손에 쥐어줬기에 1장의 티켓에만 연필씨앗이 있다. '이 씨앗을 심을 일은 없겠군!' 하며 보관용으로 걸어뒀던 것인데 심고 싶어 졌다. 갑자기.
티켓에서 연필만 쏙 빼서 투명캡슐을 열고 씨앗 3개를 꺼낸다. 다시 투명캡슐을 끼운 연필을 티켓 속 늘 그 자리에 아무 일 없었던 듯 쏙 넣고 일어선다. 적당한 화분을 찾아 분갈이용 흙을 채우고 삼각형의 꼭짓점 위치에 씨앗 3개를 콕콕콕 심는다. 겨울이 아닌 봄에 씨앗을 심고 싶어 져서 다행이란 생각도 해본다.
씨앗이 심어진 화분을 들고 다시 서재로 들어와 햇살 좋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아준다. 가만히 생각하니 무슨 씨앗인지 모르겠다. '나팔꽃 씨앗처럼 생기긴 했는데, 나팔꽃 씨앗처럼 생긴 다른 식물의 씨앗들도 있을 테니...' 평소답지 않은 호기심도 씨앗과 함께 심기로 한다.
씨앗을 직접 발아시켜 식물을 키워보지 않았기에 하루에도 몇 번씩 화분을 들여다보며 '싹이 날까?' 온 관심을 쏟아붓기 4일째 되던 날, 새싹 하나가 고개를 삐죽 내민다. 같은 날 심었는데 1개만 성공인가 보다. 그래도 새싹 하나의 기쁨은 충분하다. 봄기운 덕분인지 식물의 성장이 눈에 보일 정도로 잘 자라던 어느 날, 싹 하나가 더 보인다. 이렇게 2개의 싹이 함께 자라게 되었다.
잎 모양도 나팔꽃 같다.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비슷한 잎을 찾아봐도 나팔꽃으로 나온다. 그래도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 식물의 이름은 단정 짓지 않기로 한다. 꽃이 피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를 일인거다. 이름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존재만으로 매일 편안한 찻자리의 다화 역할을 하며 예쁘게 잘 자란다.
새로운 식구가 된 이 식물에 대해 글이 쓰고 싶어졌다. 이번에는 집게로 꽂혀있는 티켓을 가져와 앞, 뒤로 자세히 살펴보며 '헉! 어이없음'에 눈이 커진다. 티켓 뒷면에 버젓이 '나팔꽃 씨앗연필 키우는 방법'이라고 적혀있다. 그리고 캡슐은 물에 잘 녹는 단백질 성분이라며 씨앗만 꺼내어 심는 것이 아니라 연필 채로 캡슐 쪽을 아래로 향하게 흙에 묻어서 키우는 거란다.
분명 처음 이 티켓을 받았을 때 읽어봤으리라. 그리고 무의식 중에 나팔꽃임을 기억하고 있었던 듯하다. 어쨌든 잘 크고 있고, 이 식물의 이름이 나팔꽃임이 분명해졌으니 티켓의 할 일은 다했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사부작 원위치 시킨다.
아무리 소중히 기대를 안고 진심으로 사랑한다 하여 나팔꽃씨가 다른 꽃을 피우지는 못한다. 사랑받은 나팔꽃씨가 다른 식물이 되지 못했다고 미안해할 필요도 없다. 혹여 사랑을 준 이가 실망했다면 그건 씨앗을 온전히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대에 욕심을 낸 것이니 나팔꽃과는 무관하다.
분명 알면서도 모르는 척 마음 쏟았던 기다림의 시간은 그냥 온전히 나의 행복이다. 나팔꽃씨가 나팔꽃 새싹을 돋아낸 것이 기특하고, 햇살에 투명하게 빛날 하늘하늘한 나팔꽃이 기대된다. 나팔꽃임을 확실히 했으니 이제 새싹이 잡고 높이 올라갈 수 있도록 실을 매달아 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