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지인분께 받은 거라며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주신 상추가 친환경 상추였나 보다. 친환경 상추면 긍정적인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찝찝하다. '달팽이가 살고 있는 것을 보니 다른 것들도 살고 있지 않을까?' 의심이 든다. 씻어 둔 상추까지 다시 물에 담가 흐르는 물에 한 잎, 한 잎 뜯어서 심도 있게 씻어서 체에 받쳐둔다. 겨우 싱크대를 정리하고 행주로 주변을 닦는데 돌멩이 하나가 떡하니 싱크대에 붙어있다. 이렇게 두 마리의 달팽이를 만났다.
투명한 유리컵에 초록이들 분갈이 할 때 사용하는 소나무바크와 둥근 자갈을 조금 깔고 물을 뿌리고 상추를 조금 넣은 후 달팽이를 옮기고 싱크대거름망으로 덮어서 임시로 머물 곳을 마련해 준다. '주변 적당한 곳에 놓아줄 때까지 잠시만 데리고 있어야지.' 했던 것이 깜빡하고 외출하고, 분리수거 한가득 들고나가야 해서 미루고 하다 보니 며칠이 지났다. 이것도 인연인데 키워야겠다.
정보를 찾아봤을 때는 분명 야행성이라고 했는데, 두 녀석은 낮에도 계속 움직이고 먹이를 먹는다. 움직임이 많고 잘 먹어서 그런지 똥도 많이 싼다. 유리에 붙은 똥이 거슬려 '오래 못 키우겠구나! 곧 밖으로 이주시켜야겠다.'하며 헤어질 결심을 하던 어느 날, 달팽이가 움직이지 않는다. 죽은 건가 싶어서 툭 건드려보니 바스러지는 소리를 내며 '툭' 떨어진 채 미동도 없다. 초록이 외 생명은 처음 키워봐서 나의 보살핌이 부족했나 자책한다.
다음 날 아침, 달팽이가 없다. 요리조리 살펴보니 바크 사이에 숨어있다. 살아있었나 보다. 그 후 달팽이는 환경에 적응을 했는지 확실한 야행성을 보인다. 낮에는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움직임이 없다. 저녁이 되어 신선한 채소로 먹이를 갈아주고 잠시 후 다시 오면 느릿느릿 움직이는 게 보인다. 다음 날 아침이면 채소를 참 맛있게도 먹고 하얀 줄기 부분과 먹지 않는 채소만 남겨져있다. 이런 이유로 일주일에 1~2번씩 신선한 채소를 사서 냉장고에 넣어둔다. 매일 조금씩 먹이를 주고 남은 것은 내가 다 먹는다. 이 녀석들 덕분에 하루 한 끼는 채소를 듬뿍 먹으며 아주 건강해지는 중이다.
꾸물꾸물 흐린 날, 달팽이 먹이를 주고 쭈그리고 앉아 달멍에 빠진다. 저렇게 움직여서야 언제 먹이까지 가나 싶다. 그냥 가면 될 것을 더듬이로 요리조리 한참을 신중히 길을 잡고 어느 순간 채소로 향한다. 채소도 바로 먹지 않는다. 천천히 시간을 들여 음식과 먹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느린 저녁 식사 '아르치골라'를 직관하는 중이다.
처음 독립을 하고서 퇴근 후 저녁식사만큼은 스스로를 위해 완벽한 테이블 세팅을 하고 먹으리라 다짐했다. 라면을 먹어도 절대 냄비채 식탁에 올리지 않는다. 김치 한 조각도 접시에 담는다. 처음보다는 많이 간결해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설거지가 2배로 늘어나는 것을 알면서도 혼밥이 서운하지 않게 세팅을 하고 먹기 위해 노력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속도다. 어느 순간부터 천천히 창밖을 보며 음미하던 음식을 티비를 보며 후다닥 먹기도 하고, 최근에는 반주까지 즐기다 보니 내 감정에 빠져 어느 순간 그릇들이 비워져 있다. 음식 맛이 어땠는지 모를 일이다.
달팽이의 식사를 보며나도 '아르치골라'로 다시 시작해 봐야겠다. 요즘 읽고 있는 <마흔에 읽는 니체>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을 사랑하는 방법보다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몸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더 쉽다.'라고 했던가? 천천히 즐기는 식사, 내 몸에 이로운 식사, 마음의 평온까지 줄 수 있는 매일 한 끼로 내 몸을 더 사랑해 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