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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사리 Jun 06. 2024

'보리'라면

본전 생각하다 망할 뻔

가끔은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해보는 것도 어떤 측면에서는 유의미한 경험이 되기도 한다. 큰 사건이 아니라면.

  



간만에 정시 퇴근을 해서 한눈팔지 않고 집으로 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환기를 위해 모든 창문을 열기 시작하는데 창 밖에서 "농민 살리기 무료 나눔"이라는 명목의 차량 확성기 안내방송이 들린다. 간략히 정리하자면 '창고에 쌓여 있는 묵은 보리를 소비하기 위해 보리라면을 출시했고, 다음 주부터  ㅎㄴㄹ 마트에서 판매될 예정이다. 판매 전 홍보를 위해 보리라면 무료 배부 행사를 한다.'는 내용이다.


평소라면 뭐든 무료에 관심이 없는 편이고,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줘도 받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이건만 문득 라면 맛이 궁금하다.  맛이 괜찮다면 어려운 농민을 위해 구매해서 먹어도 좋지 않을까 하는 꽁꽁 싸매고 있던 선량함이 기특하게 고개를 든다. 칼퇴와 함께 4일의 연휴가 주는 마음의 쾌적함쯤으로 받아주고 분리수거할 것들을 가득 챙겨 밖으로 나간다.


분리수거를 하고 아파트 앞 공원으로 나갔는데 시간이 다 되어가도 사람들이 별로 없다. 작년 탕후루 가게가 오픈 기념으로 할인할 때는 끝이 보이지 않는 줄이 미리 서 있었는데, 무료 나눔이라는데 사람이 없다는 것에 느낌이 이상하다. 그래도 손해 볼 것 없으니 서 있는다. 안내했던 정각 시간이 되니 아저씨 한 명이 줄을 세운다. 분명히 '정각에 라면 트럭이 와서 나눔을 하고 바로 이동한다'라고 안내가 되었는데 라면 트럭이 없다. 안내방송을 하던  승합차 정차되어 있다. 역시 이상하다.


줄을 세우는 아저씨의 분위기가 무척 강압적이다. 농민 살리기 홍보를 위해 왔다는 사람의 태도라고 보기에는 이해될 수 없는 언행이지만 사람마다 개인적 성향도 있으니 넘어간다. 그렇게 15명 정도의 인원수가 모이니 뜬금없이 옆에 세워져 있던 작은 행사용 천막 안으로 안내한다. 딱 얼굴만 가려지게 설치된 개방적인 듯 폐쇄적인 분위기가 연출되는 좁은 공간에 다닥다닥 서니 아저씨가 검은 봉지를 나눠준다. 확신이 다. '라면만 바로 나눠주고 이동한다는 것은 거짓이구나!' 이것저것 잡다하게 바구니에 담긴 물품 중에 보리라면이 귀하게 가운데 놓여 있다. '보리라면뿐만 아니라 5가지 선물을 주겠다. 전국 영농조합에서 홍보를 위해 왔기 때문에 홍보를 잘 들어주면 많이 주겠다.' 그러면서 짧게 홍보하고 끝내겠다는 말을 5분 단위로 하면서 1개씩 검은 봉지에 미끼를 넣어준다.


'가까이 모이세요.', '뭐라고요?', '이 분처럼 대답 잘하면 이렇게 더 줍니다.', '나는 홍보를 위해 왔기 때문에 관심 없는 사람은 안 줍니다.'등 아저씨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그시절 국민학교 앞에서 아이들을 현혹하던 상황이 오버랩되면서 재미있다. 사람들 눈빛들도 아저씨 설명에 현혹되기보다는 '당신에게 맞춰서 호응해 줄 테니 빨리 라면 주고 끝내자.'라는 느낌이다. 잠시 그냥 갈까 고민을 하다가 설명 들으며 서있었던 시간이 아깝다. 조금만 더 설명을 들어주면 라면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바쁜 일도 없으니.


'전화받는 분 나가서 받으세요.', '대화할 거면 나가서 하세요.''저 보세요.', '가까이 오세요.', '뭐라고 했죠?' 등의 점점 강압적이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안 주겠다는 분위기를 조성하며 한 사람씩 검은 봉지에 물건을 안 넣어주는 행동 패턴으로 제외시키며 사람을 줄여나간다. 자발적으로 빠지는 사람도 생기면서 8명이 남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자신이 어느 지역 홍보팀장인지 말하면서 인삼과 홍삼 얘기를 꺼낸다. 정확한 건강 정보를 전달하며 신뢰도를 높이고, 조금씩 샘플을 주는 것보다 두 사람에게 정품을 통째로 주는 것이 홍삼 농축액의 효과를 볼 수 있지 않겠냐며 한 명씩 홍삼진액을 먹어야 하는 이유를 말하게 하며 배틀을 시킨다. 어조도 강압적인 형태에서 부드러운 형태로 바꾼다.


대기업에만 납품되던 00 홍삼진액이 10월부터 지역에서 바로 저렴하게 판매될 예정이라 홍보를 한다면서 두 사람만 어떻게 주겠냐며 1+1으로 모두 줄 테니 1개는 무료이고 1개는 농민을 위해 5개월 할부로 지불하면 된단다. 얼렁뚱땅 그렇게 한 명씩 홍삼상자와 라면을 받아서 밖에서 대기 중이던 사람에게 인도되어 나간다. 자연스럽게 가버리는 사람을 제외하고 4명쯤 그렇게 홍삼상자와 라면을 받아서 나가고 나만 남았다.


'지금 바로 결재를 하라는 뜻인가요?"라고 굳이 묻는다. 의미 없는 질문이지만 홍삼상자를 받지 않으면 라면도 받을 수 없는 마지막 상황이 황당하다. '또 이해를 못 했네?"라는 대답. 30분 내내 조장되었던 공짜만 밝히고, 농민의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도덕한 사람이라는 뉘앙스가 강하게 전달되며 태도가 돌변한다. '네, 이해했습니다.'짧게 답하고 나온다. 뭔가 이런 상황에 끝까지 있었던 내가 신기하고 새롭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분이 바로 앞 횡단보도에 서 있다. 표정을 보니 이런 상황에 속아서 끝까지 듣고 있었던 자신에 대한 망함이 묻어있다. 신호 바뀜과 동시에 아파트 단지 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나 또한 멋쩍음이 동병상련이지만 여유 있는 척 나는 걸어서 사라져 본다.


무료 나눔이라는 안내에 무료로 받으러 갔는데, 공짜만 밝히고 농민의 어려움을 외면하는 부도덕자로 만드는 방식.

반복해서 한 명씩 사람을 제외시키면서 다른 행동을 차단시키고 자신의 말만 듣도록 유도하는 방식.

정확한 건강 정보를 섞어서 신뢰도를 높이는 방식.

어찌보면 별 것 아닌 라면을 중심에 두고 자존심을 자극하는 방식.

정확하게  이 사람의 의도를 알고 있지만 조금만 더 들어주면 끝나겠지라는 미련을 갖게 하는 전개.


뉴스 사건으로 또는 드라마에서만 보던 것을 경험하며 '내 삶의 테두리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상황이 오늘 나의 변덕 덕분에 경험할 수 있었구나' 생각하니 30분이 딱히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합리화도 하게 된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무도 홍삼농축액을 구매하지 않은 것 같았다. 집으로 올라와 공원을 내다보니 그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다. 만약 누군가가 제품을 구매하고 집으로 돌아가다 마음이 바뀌어 돌아왔다면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제 와서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ㅎㄴㄹ마트든 영농조합이든 믿을 만한 곳에서 하는 홍보라면 관리실을 통해 아파트에서 자체적으로 안내방송이 나왔을 것이다. 진짜 보리라면을 판매하는 업체에게는 이지미에 무척 부정적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스친다. 나부터 어딘가에서 보리라면을 보게 되면 오늘의 에피소드가 바로 떠오르며 웃음으로 구매를 대신할 것 같으니 말이다.



 

본전 생각에 금보다 소중하다는 시간을 허비했지만 합리화에 능한 하루사리에게는 유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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