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은 별일이 아닌 일
매 순간의 선택이 쌓이면 별일이 된다.
한 달 전부터 차 key가 말썽이다. 인식을 했다가 안 했다가 차문이 열렸다가 안 열렸다가 오락가락이다. 차 key의 건전지가 다 된 것이다. 그냥 건전지만 바꾸면 될 일이지만 귀찮다. 굳이 번거로움을 감수한다. 차를 탈 때마다 운전석 손잡이를 눌러서 되면 타고 안되면 몇 번을 누르고 누르다 결국 차 key에 내장된 수동 key를 꺼내어 문을 열고 수동으로 시동을 건다. 이렇게 불편하면 건전지를 교체할 만도 한데 게으름이 불편함을 이긴다. 엄연히 따지만 믿도 끝도 없이 버티기에 들어간 게으름이 말썽인 거다.
퇴근길, 자연스럽게 루틴처럼 반복된 차문 열기를 도전하며 익숙하게 수동으로 차문을 열고 수동으로 시동을 거는데 앞 유리너머로 범퍼 위의 새똥이 눈에 들어온다. 뭘 그렇게 맛있게 먹었는지 살구색 열매씨앗과 과육이 적나라하게 펼쳐져있다. 바로 닦을까 잠시 생각하다가 집에 도착하면 닦아야지 미룬다. 당연히 집 주차장에 도착해서도 다음에 닦지 하며 무시한다.
날씨가 적당히 흐린 출근길을 달리는데 바다가 보고 싶다. 바다를 보면서 흘려보내고 싶은 무언가가 꿈틀꿈틀 거리는 이끌림이다. 출근하자마자 조퇴를 신청한다. 조퇴시간에 맞춰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에 다가가는데 자연스럽게 사이드미러가 반긴다. 편안하게 차문을 열고 출발하려는 찰나에 새똥이 눈에 들어온다. 생각이란 걸 하기도 전에 물티슈 몇 장을 뽑아서 밖으로 나간다.
하루가 지나서 그런지 잘 닦이지 않는 새똥을 나름 열심히 제거하고 기분 좋게 차문을 딱 열려는데 안 열린다. 아무리 손잡이 버튼을 눌러도 안 열린다. 알고 있다. 잠겼다. 안 열릴 것이다. 차 key가 다시 out 모드가 된 것이다. 휴대폰도 차 key가 들어있는 가방도 모두 차 안에 있다. 애꿎은 차문을 반복해서 당기면서 난감한 시간을 버텨본다.
회사 건물로 들어가 조심스레 낯선1층 사무실 문을 연다. 평소 목례 정도 외에는 말 한마디 해보지 않은 직장동료에게 해당보험사 긴급출동 번호 검색을 부탁한다. 회사 전화로 긴급출동을 요청한다. 상담사가 출동기사님이 다시 회신할 휴대폰 번호를 불러달라는데 난감하다. 일단 지금 번호로 회신을 부탁한다. 전화를 끊고 몇 분 후 기사님께 전화가 온다. 근처에 도착하면 연락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머뭇거린다. 전화를 받을 수 없음을 설명한 후 회사주차장 입구에 서 있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는다.
사람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게으름을 포지션으로 정했으면 차 key의 배터리를 한 달 동안 교체하지 않은 것처럼 새똥도 비가 내길 때까지 하늘이 허락한 세차일까지 버텼어야 한다. 아니면, 하루 만에 생각할 틈도 없이 새똥을 닦는 애매모호한 부지런함으로 차 key 배터리교체도 하루 만에 해결했어야 한다. 절묘하게 완성된 게으름과 부지런함은 이 순간의 별일을 만든다. 하지만 별일이 별일이 아닌 듯 해결되어 차 시동을 건다.
이미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어야 하는 시각에 걸린 시동에 주춤한다. 남해바다가 보이는 카페를 목적지로 입력했던 내비게이션의 설정을 바꾼다. 집 주변 카페로 정한다. 오며 가며 보기만 하고 한 번쯤 가봐야지 마음만 먹고 있던 곳이다. 뭔가 자연스럽지 않게 일이 생길 때는 최대한 심플하게 마음을 정하는 것이 좋다.
바다는 보이지 않지만 조용하고 화이트&우드톤의 따뜻함이 느껴지는 작은 카페다. 커피 맛을 기대하지는 않기에 카페 대표메뉴인 수제바닐라라떼와 우유롤을 주문한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전해진 트레이를 받아서 자리에 앉은 후 라떼를 한 모금 마신다. 눈이 번쩍 뜨인다. 지금까지 마셔본 바닐라라떼 중에서는 단연코 가장 맛있다. 부드럽게 달콤한 딱 기분 좋은 바닐라라떼다. 아티가 가장 좋아하는 커피메뉴인데.
낮에 읽은 책 내용이 생각난다. 사람은 수천 가지의 인생을 살 수 있지만 자신의 선택에 따라 딱 한 가지 인생만을 살게 된다는 말. 여기서 달콤한 바닐라라떼를 마시며 몽글몽글 글을 쓰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 달 동안 차 key의 건전지를 교체하지 않는 선택을 했고, 변덕스럽게 하루 만에 새똥을 닦는 선택으로 40분이라는 시간을 주차장에서 보내는 별일 아닌 별일이 생겼고, 계획했던 남해가 보이는 카페를 포기하는 선택을 통해 처음 와보는 카페에 있는 나다.
아무리 맛있는 바닐라라떼지만 딱 반 이상은 마시기 어려운 하루사리
P.S
다음날,
비가 온다.
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