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동료와 함께 영화관에 갔다. 보고 싶은 영화는 일행이 이미 봤다고 하니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서로 보지 않은 영화를 선택해 보기 시작한다. 제목이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화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기에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라는 영화의 제목은 거부감이 들기까지 한다.
이런 학원물을 보기에는 나이가 들어 버린 것인가 불필요한 자격지심을 느끼며 영화의 엔딩을 향해갈 때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울림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한 사람의 삶에 대한 기준이 된 하루사리가 탄생하게 된 운명 같은 순간이었다.
주인공은 시한부 선고를 받고 마지막을 준비하며 약속 장소에 가던 중 묻지마살인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시한부라는 운명에 의해 곧 죽음을 맞이할 소녀는 자신의 상황과 상관없이 죽음을 맞는다.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단지 그 순간에 있었다는 운명으로 자신에게 닥친 죽음이다. 죽음의 직전까지 시한부 인생으로 죽음의 공포로 살아왔든 시한부 인생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든 개인의 상황은 의미가 없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중요하지 않다. 삶의 끝이 오늘 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오늘 하루 지금 현재 내가 존재함에 삶은 의미가 있고 소중하다. 닥쳐올 두려움과 걱정으로 오늘을 보낸 들 어차피 닥칠 일은 오고, 닥치지 않을 일은 오지 않는다. 준비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내일의 두려움과 걱정으로 평온할 수 있는 오늘까지 두려움과 걱정으로 보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하며 애써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 일 없듯이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