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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07. 2023

응축의 시간

방바닥을 구르다가

 비가 오는 연휴 동안 집안을 잘도 굴러 다녔다. 지루해서 낮잠을 쬐금 잔다는 것이 애들이 영화를 한 편 다 볼 정도의 시간 동안 잠을 잤다. 애들 옆에서 잠을 자던 나는 이리저리 바닥을 뒹굴었다고 한다. 아마도 잠을 설친다 그런 것 일 텐데. 그래도 개운하게 푹 잤다. 

 오전에는 김밥을 말고 쿠키를 구웠으며 호떡을 만들었다. 이걸로 글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사진도 몇 장 찍었는데 오후가 되니 그런 기력도 다 사라져 버렸다. 비는 퍼붓고. 밖을 나가야 살아나는 사람인데. 집에 갇혀 있으려니 갑갑하기 짝이 없었다. 애들과 따로 시간을 보내는 법도 잠시 잊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집안을 데굴데굴 굴러 다녔다. 내가 이렇게 늘어진 시간들이 오늘뿐이었을까. 아이들이 어릴 때는 더 오랜 시간을 어둠 속에서 굴렀던 것 같다.      









 둘째를 낳고 백일이 넘었을 무렵부터 우울하다는 생각을 곧잘 했다. 사람을 만나는 게 어려웠다. 차 한 잔 하자는 말이 입 밖에 잘 나오지 않았다. 지금처럼 시간을 때우려 잠을 잔 적 도 많았다. 일하는 남편에게 당신은 나갈 때 바람이라도 쐬지 않냐며 소리쳤다. 나는 집에 매여서만 산다고. 

 애들의 실수를 가만두지 않았다. 물을 쏟고 우유로 물건을 적시는 것은 아이들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인데. 시도 때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밤이 되면 다 내려놓고 도망치고 싶었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만으로 죄스러웠다. 엄마가 돼서는. 

 지금 생각하면 그날들이 아찔하다. 나는 심한 우울감을 앓았던 것이다. 일 년 가까이 내가 살아가는 시간들에 대해 죄책감이 가득했다. 그때는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낯가림이 심해졌고 아이를 돌보는 게 가끔 하기 싫고 힘들 뿐이라는 생각만 가득했지. 그러나 마음이 채워지고 나서는 그때의 내 모습을 깨닫게 되었다.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지쳐 있었다는 것을. 세상을 또 다른 관점으로 볼 힘이 없었다는 게. 수많은 시간을 죄책감으로 버무려진 날들을 보내고서야 나는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힘을 내서 살기 시작했다. 어제와 전혀 다른 시간을 만들겠다고. 아이들에 대해 잠시 잊었던 날들을 보상이라도 하듯 더 안아주고 눈을 맞췄다. 이 순간들은 건너뛰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좋아하는 일을 3년 가까이 해 본 적 있다. 처음에는 용돈만 벌어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어려운 시간들을 기꺼이 맞으려 했다. 가치를 평가받으려 공원에서 내가 만든 간식을 팔았다. 결국엔 취업도 했다. 카페에서 아주 적은 가짓수의 디저트를 팔 기회도 얻었다. 손님들에게 음식을 권하며 맛을 물으러 다닐 정도로 당돌했다. 가게 앞에 좌판을 펴 놓고 사람을 불렀다. 얼마 가진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열과 성의를 다하던 날이 지나서 생기를 잃어갔다. 역시나 돈이 문제였다. 발자국처럼 남아있는 디저트를 보기에는 더 이상 일에 대한 온기가 내 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만두겠다 말하고 막막했다. 그래서 걸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세상을 잊으려 길을 걸었다. 처음 가본 곳을 얼마나 씩씩하게 걸었던지. 반나절을 걷고는 맛있게 밥을 먹었다. 눈썹이 얼 정도로 추운 날씨에도 감히 길을 걸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더니 다시 살아갈 맛이 났다.      

 


 비 내린 어린이날, 애들이 딱하긴 했지만 그날들처럼 도저히 힘이 나질 않았다. 이불을 개고 화장도 엷게 했다. 요리를 하며 시간을 함께 보내겠다 다짐했건만 시계는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창 밖에는 비가 잦아드는가 싶더니 다시 퍼붓기 시작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니 밖에 나가서는 안 될 날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버스를 타고 우산을 들고. 양말이 다 젖은 채로 말 안 듣는 두 아들에게 잔소리할 걸 생각하니 딱 누워있고 싶었다. 그렇게 자리에 널 부러져 애들은 게임을 하고 나는 영화를 봤다. 어린이들을 위한 오늘 같은 날에 뭐 하는 짓 일까 하는 생각일랑 베겟 속으로 묻어버렸다. 지쳤다고. 오늘은 그래도 쉬고 싶다며 나에게 집중했다. 남편이 올 시간을 기다렸다. 마칠 때가 되니 몸에 힘이 났다. 남편과 함께 애들을 데리고 드라이브를 했다. 아이스크림을 사서 같이 먹었다. 그리고 별 볼 일 없는 하루는 거의 끝나갔다.      

 



© anant90, 출처 Unsplash






 애들을 재워놓고 남편과 이야기를 하면서 든 생각은 뒹굴 거리고 다시 힘이 났으니 이것도 좋은 것 아니냐는 것이다. 비록 오늘 같은 특별한 날이 보통의 날 보다 더 못한 시간이 되었지만 말이다. 

 하루를 삶이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라지만 예외의 날도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렇게 지쳐 버린 날. 아무리 용을 써도 힘이 나지 않는 날. 게으름을 탓하는 누군가에게 엄마 된 도리를 수군거리는 다른 이에게 나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굴곡진 인생에서 잠시 웅크려야 할 때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무모한 것이 아니다. 다시 피어나기 위해 내 안에 에너지를 모으는 날인 것이다. 매미가 땅 속에서 땅 위의 시간을 생각하듯 어쩌면 꼭 필요한 순간인 것이다. 

 갇혀 보았기에 살아가는 날들은 더 절실해질 것이다. 당연한 것은 더 소중하게 여겨질 거다. 비를 지나 뜨는 해가 고마운 것이다. 연둣빛 새순이 반갑고, 애들의 살결이 이 토록 보드랍다는 것을 알아 가는 것이다. 웅크린 시간이 있었기에 모든 게 감사한 것이다.      


 이제는 널 부러진 나를 미워하지 않으려 한다. 세상을 잠시 잊고 싶어 잠을 청하는 나에게 소리치지 않으려 한다. 내가 다시 피어나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라는 것을 바닥을 굴러다니며 깨달았다. 내일이 더 좋으려고 오늘 이토록 늘어진 다는 것을. 쓸모없는 순간은 없다는 것을. 모든 시간들이 다 내 역사가 된다는 것을. 

 다음 날은 잔잔한 비를 뚫고 아이들과 버스를 탔다. 어제의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듯. 물이 젖어드는 양말조차도 아무렇지 않다. 비를 머금은 나뭇잎을 보고 싱그러움을 느껴본다. 뒹굴던 어제와는 판이하게 다른 오늘이 사랑스럽다. 

바닥에서 늘어졌기에 오늘이 감사한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 bakutroo,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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