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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May 17. 2023

가장 좋은 것을 내게 줄게

옷을 고르면서 드는 생각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꼬마 아이가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오래 쳐다본 적이 있다. 반짝 거리는 에나멜 구두를 신고, 풍성한 치마를 입은 그 아이의 모습은 어린 공주 같았다. 손에 자주 걸리는 옷을 아무 생각 없이 입은 내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 아이처럼 귀하게 입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내가 원하는 옷을 입는 일상의 날들은 과연 어떤 것일까 하며.     



 아름다운 가게에 발을 들였던 건 꼬마 아가씨를 본 것보다 더 오랜 일이었다. 나는 돈을 아낄 요량으로 중고물품을 판매하는 그 가게에 이른 손님이었다. 다양한 옷과 잡화들이 즐비한 그곳에서 그나마 괜찮은 옷을 고르겠다는 마음으로 자주 들렀다. 그러던 내 마음이 어린 숙녀를 보고 나서부터 뒤 바뀌어 버렸다. 내게 가장 어울리는 스타일을 찾겠다는 마음으로. 제일 멋들어진 것을 찾는 게 아니라 내 몸에 가장 잘 맞고, 안색이 화사하게 보일 수 있는 색깔의 옷감을 찾겠다는 생각이 다분했다. 

 그날로부터 아름다운 가게에 들를 때면 집요하게 옷을 물고 늘어졌다. 거울을 보며 슬쩍 옷을 대보곤 됐다 하고 넘길 것이 아니라 입어보고 조금 부족하다 싶으면 세탁소에도 맡겼다. 소맷단을 자르거나 발목 부위의 품을 원하는 만큼 줄이기도 했다. 몇 천 원 하는 옷이 배로 돈이 들어도 나에게 맞는 것을 찾는 일이 중요했다. 나는 꽤나 진지했던 것이다. 아무거나 입는 것에서 정말로 좋아하고 잘 어울리는 옷을 찾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던 거다.     


 집에서도 현관에 딸려 있는 전신거울을 바라보며 이리저리 상, 하의 옷의 맵시를 따져 물었다. 누구 하나 내게 옷 잘 입는다는 사람 없었지만 내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남이 기준이 아니라 내가 입었을 때 기분 좋은 것을 찾고 싶었던 까닭이다. 편하지만 입었을 때 등판의 실루엣이 널따란 밥상 같지 않을 것. 그러니 넉넉한 품을 낙낙하게 잘 가려 줄 우아한 옷을 그토록 찾아 헤맨 것이다.


 헹거에 걸어두고 모셔만 놓는 옷들은 과감히 정리해 버렸다. 보았을 때 설레는 감정이 들지 않는 것들도 똑같이 그리했다. 그랬더니 헹거에는 조촐한 수의 옷들만 남았다. 다행히 고 작은 가짓수의 옷들을 고르는 일들이 경쾌해지기 시작했다. 웬만하면 다 좋아하는 옷들만 남았으니 말이다. 

 목이 짧은 나는 헨리넥 스타일의 셔츠를 고르며 얼굴이 각지고 둥글기도 한 편이라 브이넥의 옷을 선호하기도 한다. 허리도 두툼한 편이라 티셔츠가 잘 받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세상엔 다양한 분홍색이 있어서 그중에서도 쨍한 분홍빛의 옷을 입으면 내 얼굴색이 죽어버린다는 것도  옷을 고르면서 배웠다. 그나마 괜찮은 옷보다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옷들의 가짓수가 늘어가기 시작하니 골라 입는 즐거움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옷을 고르는 것처럼 삶에서 중요한 것을 고를 때에도 나는 그나마 괜찮은 것을 골랐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무르고 둥근 사람이 되길 바라서 사람을 사귈 때도 일을 찾을 때도 이 정도면 고만고만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사실 까탈스러운 나였기에 아무렇게나 취한 것을 뭉근하게 오래 지속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궁금하면 참는 것이 어려웠기에 이것저것 다양한 운동에 취미를 가졌더니 나에게 잘 맞는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었다. 헬스는 지루했고, 수영을 할 때나 줌바 댄스를 출 때는 입맛이 돌았다. 좋아하는 일을 할 때는 어려운 것들이 다가와도 쉽게 물러서지지 않았다. 불편한 것보다 애정이 더 넘쳐서 함께 춤을 추는 곁의 사람이 불편해도 꾸역꾸역 줌바를 추러 갔던 나를 떠 올렸다. 수모를 쓴 내 모습이 못생기고 볼품없어 보이더라도 물에 참방 달려들면 짜릿한 맛이 있어 가는 일을 멈추는 게 어려웠다. 

 힘들고 불편한 점은 잠시였다. 고 지점을 넘어서면 잘 맞는 옷처럼 편안하고 몸에 착 들어맞는 시기가 다가왔다. 그건 아무 데나 오는 것이 아니었다. 오래 들여다보고 살피고, 맞춰보고 때론 내려놓을 용기도 필요했다. 뭣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한 가지 부분이라도 치명적인 매력에 빠져버리면 헤어 나오기 어려웠다. 줌바의 비트가 섞인 음악이 귓전을 때릴 때 내 심장도 함께 춤춘다는 것을 알아버린 그런 순간들 말이다. 다른 것들과 비교했을 때 나와 가장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한 눈 파는 게 쉽지 않았다.      


“진짜 잘 어울리시네요.”     

 

 따로 맞춘 것만 같은 한 벌의 옷을 입은 것처럼 춤을 추는 순간은 편안하고 생각과 몸이 자유로웠다.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았기 때문이려나.

 


 사람과의 관계는 어떨까. 외롭다고 아무에게나 속의 것을 다 받쳐서 내게 돌아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내가 편안한지 애를 쓰는지 묻고 따지지도 않았던 만남들은 내게 무해했을까? 물처럼 흘러가는 관계가 아니라 노오력해야 하는 사이는 오래가는 일이 힘들었다. 결국에는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편안한 관계는 그러하던가. 서로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내 입맛에 맞게 변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이는 만날 때마다 산뜻했다. 돌아서면 또 만나고 싶고,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며 웃는 일들이 즐거웠다. 이익을 따지지 않고 서로 커피 값을 내겠다며 아웅 대던 친구와의 만남은 생각만 해도 고소했다. 어떤 관계가 좋은 사이인지는 그와 있을 때의 감정을 잘 들여다보고 꿈처럼 떠올려보면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진짜 나로서 그대를 만나는지. 꾸며서 잘 보이려 무진장 애를 쓰고 있는 것인지.      


 옷을 하나 둘 고르며 알게 되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고르고 입을수록 진짜 나 자신이 되어 간다는 것을.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대로 살던 일상을 오래 들여다보고 눈여겨볼수록 내게 더 이로운 것을 찾게 된다는 것도. 그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도. 나만의 잣대를 가지고 수없는 가치 치기와 실수와 실패가 범벅이 된 날들 속에 건져 올릴 수 있는 귀한 일들이라는 것을.      


 반짝이는 에나멜 구두를 신은 그 꼬마 숙녀는 설레는 옷을 입고 길을 나섰던 그날,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마음에 쏙 드는 치마를 입고 걷는 한 걸음, 걸음이 즐겁고 신이 나지 않았을까. 어떤 좋은 일이 생길까 기대되진 않았을까. 나도 그 꼬마친구처럼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선물하고 싶다. 오래 걸리는 일일지라도 충분히 들여다보며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을 건네고 싶다. 그걸 품고서 오늘 하루 즐겁고 힘차게 살아가고 싶다. 





© mariabeatrice,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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