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수 Sep 09. 2023

지금 모습 그대로 충분한 당신


“이 컵 좀 갖다 버려라. 얼마 한다꼬. 물 마실 컵이 한 개도 없네.”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따뜻한 차를 마시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컵 안쪽 가장자리, 잘 지워지지 않는 차의 흔적이었다.

설거지에 꼼꼼하지 않은 나는 컵의 물때를 씻는 것은 더 대충이었다. 그래도 세제를 묻힌 수세미로 바득바득 닦는데. 컵 안쪽 깊이 자리한 차 마신 흔적은 잘 지워지지도 잘 지우고 싶지도 않았다. 남편이 컵을 갖다 버리라고 말한 순간 더 박박 씻고 싶지 않았다. 나는 괜찮다고. 어쨌거나 세제로 거품 내어 컵 안쪽까지 씻지 않았냐고 속으로 우기고 있었다.


매번 장을 보러 갔다가 놓치는 것이 베이킹 소다 사는 일이었다. 다른 물건은 열심히도 사들이면서 베이킹소다는 리필의 무게도 무겁고 왠지 사고 싶지 않았다. 그러던 찰나, 컵의 물때가 저 베이킹 소다와 식초 한 방울만 있으면 해결될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드는 날이 있었다. 때마침 앙증맞은 사이즈의 베이킹 소다가 있어 당장 데려왔다.



문제의 컵들을 주르륵 내어놓고, 베이킹소다를 흩뿌렸다. 식초를 한 방울 뿌려 놓고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컵을 살짝만 씻었는데 물때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세제도 아니고 철 수세미로 닦는 것도 답이 아니었다. 물때를 지우는데 좋은 방법이 있었는데. 조금만 시간과 성의를 기울이면 컵 본연의 모습을 오롯이 찾을 수 있었는데.

말개진 컵을 보노라니 내 마음까지 맑아졌다. 안 버리길 잘했다. 제대로 된 도움을 받으니 제 모습으로 자리하게 된 까닭이다.








요즘 취업 준비를 하자니 속이 갑갑하다.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갈 마음은 전혀 없다고. 그 일을 제외하고 이리저리 구 인사이트를 보자니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새벽까지 구인광고를 뒤지길 여러 번, 요즘은 잠도 설친다. 조급함을 내려놓으라지만 그게 어디 쉬울까.

십 년,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남는 게 없다는 생각에 허무함이 몰려든다. ‘나 잘못 살았던 걸까?, 나 쓸모없는 걸까’. 별의별 생각들이 귓전을 때린다.



이력서에 적을 자격도 진짜로 할 줄 아는 것도 애 보는 것과 살림하는 일 밖에 없다는 생각에 고개가 떨궈진다. 아이를 키울 때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는데. 난 왜 자신감이 바닥까지 떨어진 것일까. 나도 저 물때 가득한 컵처럼 지금의 내 인생,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 하는 걸까. 박박 닦아서 새것처럼 만들고 싶어도 컵에 잔뜩 끼인 때처럼 낡아진 내 모습을 무시할 수가 없다. 나보다 나이 많은 언니들은 내가 한창 좋을 때라는데. 그 말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그렇다고 해도 일자리를 구하고 일에서 만족한다고 내 삶이 마냥 빛나는 것일까. 내가 다시 젊어진다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나는 항상 행복할 것인가. 그것도 정답은 아니라는 생각이다. 그 순간에 반짝 빛도 날지 모르지만 영광도 오래 가진 않을 것이다.










나는 뭘 잘 해야지, 무얼 가져야지만 더 나은 사람이 돼야지만 잘 살고 잘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내게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 별이고 꽃이라고, 태어난 순간부터 가치 있는 존재’라는 지나영 교수님의 말은 나라는 사람 자체를 다시 바라보게 만들었다.



내게 지금 필요한 것은 취업도 성공도 아닌 교수님의 말처럼 지금 그대로의 나를 존중하는 마음이었다. 원하는 일을 하건 잘하는 일이 생기건 그게 내 인생의 목적이 될 순 없다. 내가 그 일들을 이루게 된다면 아마 나는 더 나답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일만을 위해서 살 수는 없다.


나는 나 자신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잠시 컵의 물때처럼 나의 개성과 나다움이 흐려져 있을 뿐인 게다. 그 어렵고 두려운 마음을 걷어 내면 나는 다시 뽀얗게 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렇게 나다움을 찾기 위해 베이킹 소다와 식초처럼 나를 잘 빛나게 해 줄 일과 일상을 찾아야 하는 것이리라. 그것들을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해서 내가 쓸모없는 사람은 아닌 것이다. 존재가 이유인 것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고 무언가를 손에 쥐지 않았다고 내 존재를 탓하는 일은 그만두려 한다.

지금 순간 내가 원하는 일을 찾을 순 없어도 거기에 다다르려는 내 노력 자체로도 충분한 것이다.

속도가 느리더라도 방향이 옳다면 돌고 돌아서라도 나다운 길에 이를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렇게 주문처럼 외운다. 있는 그대로 참 괜찮은 나라고.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내 모습 자체가 귀하다고.

잘하고 있다고. 잘할 수 있다고. 나는 가치 있다고.

지금 모습 그대로도 충분하다고. 그 누가 뭐래도.











© zaccain, 출처 Unsplash






작가의 이전글 나만의 취향을 가지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