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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수 Sep 27. 2023

지적하는 게 당연한 문화에서

“너 머리가 왜 그래.”

“살이 왜 그렇게 쪘어? 달덩이가 다 됐네.”

“니 등 뒤에 옷 찡기는 거 알제?”


다 내가 한 번씩이 아니라 어떤 말은 여러 번 들어 본 말이다. 


그들은 다들 나를 위한 관심이라며 하나 둘 훈수를 뒀다. 그때는 그걸 몰랐다. 그 말들이 잘못된 거라는 걸. 나는 그들의 말을 온 진심을 다해 기억했다. 그리고 바꾸기 시작했다. 더 어울리는 머리를 찾기 위해. 등 살이 안 찡기는 옷을 찾기 위해. 심지어 내 얼굴살을 축소시키기 위해 저녁을 고구마로 먹는 생활을 꽤 오래 이어왔다. 그렇게 몸과 헤어스타일들이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변화된 몸으로 나는 자존감이 업 되었을까? 기분이 마냥 좋았을까. 그 사람들의 말에 더 무게를 두고 내 삶의 스타일을 변화시키고 있던 순간 나는 썩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들의 말을 듣고 변화시킨 내 모습에 대해 오랜 시간 만족하지 못했다. 또 머리를 자르면 두근두근거렸다.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을까. 내 생각에 잘 차려입은 날에도 마음 한쪽 구석에선 긴장감이 들었다. 또 아줌마 같다고 하면 어쩌지. 


왜 세상은 내 모습을 가만 안 두는 걸까. 내가 원해서 꾸민 스타일들이 그렇게나 이상한 걸까. 다른 사람에게 만족을 주는 내 모습을 만들어야 하는 걸까. 

슬펐다. 이런 몸을 가지고 얼굴을 가진 나란 존재가. 이십 대 때는 나에 대한 혐오가 심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음식을 먹고 토한 적도 있다. 10킬로를 넘게 살을 뺐는데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까 너무너무 두려웠다. 그 내면의 깊숙한 곳에서는 외모에 대해 누군가에게 지적받으면 어쩌지 무시당하면 어쩌니 하는 마음들이 서려 있었던 것 같다. 더 깊은 마음속에는 이렇게 촌스러우면 소외되고 심지어 버려질 까봐 두려웠는지도 모를 테고 말이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이던 내가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된 일이 있다. 한창 사람들의 말에 휘둘려 사는 게 지긋지긋하던 내가 사람마다 가진 경계가 있다는 것을 문요한 선생님의 ‘관계를 읽는 심리학’이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내 생각은 타인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고. 나의 기질, 내가 살아온 환경들이 나의 경계를 만든다고. 그들이 내가 만든 경계를 넘어온다면 NO!라고 말하는 것은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라고. 

이 책을 몇 번이고 읽어내며 내 외면과 내가 가진 정신들이 전적으로 내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런 생각이 공고해지니 더 이상 남이 나의 외면과 내면을 건드리는 것을 참기 어려웠다. 처음엔 ‘네가 뭔데’하는 반항심으로 시작해서 ‘내 외모, 내 마음은 내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나 또한 남에게 좋은 말만 했을까. 나도 모르게 그의 외모를 지적하고 특히나 내 아이들에게는 서슴없었다. 아이도 하나의 인격을 가진 존재인데 그 아이의 외모에 대해서 꼬치꼬치 지적했다. 다 너를 위한 일이라며. 눈을 가린다고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는 아이의 앞머리를 억지로 잘라버린 적도 많다. 빼빼 마른 아이의 몸매를 두고 아무렇지도 않게  탓할 때도 있었다. 그게  다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나도 나를 지적한 남들만 탓하기에는 할 말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이 글을 쓰며 느끼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머리카락도 함부로 자르지 않았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소중한 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땋아 다니고, 상투를 틀어 고이 간직했다. 개성이 넘치는 지금은 내 신체의 일부인데 그런 게  어딨냐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하겠지만 말이다. 

다시 생각해 보면 과거의 이야기도 의미가 있고 지금의 이야기도 의미가 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내 외모는 그렇기에 더욱 소중한 것이다. 나란 존재 자체도 소중한데 부모님의 면면들이 하나하나 깃들어 있는 나는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일까. 그러니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기르는 행동의 깊은 뜻은 내 몸을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대하자는 지혜가 담겨 있는 게 아닐까. 





오늘날 개성을 따지는 것 또한 충분히 가치 있다. 

내 외면은 나의 것이다. 누군가의 눈에 보기 좋으면 뭘 할까.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아니 그들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애쓰면서 살다 이리저리 한소리를 들으면 나는 어느 장단에 리듬을 맞춰야 될까. 그들의 말에 울고 웃는 것은 꼭두각시처럼 사는 일 아닐까. 그게 과연 행복하고 진심으로 자신을 존중으로 대하며 사는 삶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 외면과 내면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 함부로 내 가치를 평하는 그들이 무례한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외면을 지적하는 일이 방송에서도 일상에서도 당연한 일이 되었지만 엄연히 내 얼굴이고, 내 몸이다. 그걸 평가할 자격은 나에게 있는 것이다. 내가 괜찮으면 다 좋은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에 주도권을 건넬 것이 아니라 다시 내가 되찾아와야 하는 것이다. 무례함에 당당히 톡 쏘아버릴 강한 성격은 되지 못하더라도 표정으로 때론 말도 단호해 보려 애쓸 것이다. 

‘나는 마음에 든다고. 원래 가지고 있던 내 모습도 괜찮다고. 그러니 이젠 그만하시라고.’


모두가 지적하는 게 당연한 세상에서 나는 당연하게 나를 지키고 지지한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내 신체의 일부를 하나하나 사랑하는 노력을 해 보련다.

그 누구도 아닌 내 편이 되어서 나를 아낀다. 




Unsplash의Clem Onojegh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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