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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수 May 10. 2024

8화. 예테보리 공항(空港)의 백야

공항 이야기 / 에세이

  입사하자 회사에서 제일 먼저 제공한 것이 사원증, 명함, 여권, 법인카드였다. 한 번도 해외에 나간 본 적이 없어서 여권을 받고 당장 해외 출장이라도 갈 듯 며칠 동안 양복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봤다. 그 당시 여권은 발급도 어려웠지만, 신분 보장이라는 확실한 증명서이기도 했다. 가끔 바이어 마중하러 김포공항(인천공항 개항 전)을 가면 출국도 하지 않으면서 여권을 들고나갔다.

  첫 출장은 담당 지역이 유럽이라 2주간 6개국 출장을 가게 되었다. 비행기 일정은 부서장이 직접 잡아주었다. 첫 목적지는 예테보리였다. 비행기 일정을 보자 조금 이상했다. 예테보리는 직항이 없어 일반적으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환승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환승은 나리타공항, 유럽에서 가장 환승이 복잡하고 어려운 히드로공항이었다. 지옥 같았던 공항 환승 훈련이었다.

  히드로공항의 미로를 헤매면서 간신히 예테보리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시계는 저녁 8시를 향해 가고 있는데, 아직도 대낮처럼 밝았다. 비행기가 스칸디나비아반도에 들어가면서, 구름 사이로 호수와 숲이 조화를 이뤄 대자연의 풍광이 지나가고 있었다. 멀리 예테보리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날이 밝아서인지 뿌옇게만 보였다. 승무원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 곧 도착 예정이라 안전벨트를 확인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아침에 출발해 시차도 없이 거의 20시간 만에 도착했다. 기나긴 여정은 초긴장으로 인해 피곤함도 모르고 왔다. 예테보리 공항은 개항한 지 몇 년이 되지 않았는지 초현대식이었다. 비행기의 짐을 기다리며 잠시 주변을 둘러보니 김포공항의 초라함이 느껴졌다. 하루에 4개 공항 방문이 또다시 가능할지 모르겠다. 공항 앞에 호텔 리무진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밖은 아직도 환했다.


  호텔 체크인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자, 11시가 넘었는데 아직도 밖은 밝았다. 처음으로 겪어보는 백야는 비행기에서 잠시 눈을 붙이기는 했지만, 종일 잠을 자지 못했는데도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다행히 창문의 커튼이 검은색 두꺼운 천으로 되어 있어 어스름한 저녁 빛을 가릴 수 있었다. 한국은 이제 아침이 밝아 오겠지 하면서 얇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예테보리의 아침맞이 준비를 했다.      

  예테보리 방문 목적은 유럽 시장 중 작은 나라가 많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의 시장 개척을 위해서였다. 주변 국가 무역 상인들이 예테보리에 회사를 두고 자국으로 제품을 가져가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독립한 발틱 3국 등 주변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아직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무역 거래에서 대금지불 등 많은 어려움이 있어서 중계 무역지로 활용할 목적도 있었다. 

  스칸디나비아반도의 중심부에 있는 예테보리는 북대서양과 발트해의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 때문에 무역과 해상 운송으로 스웨덴의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북유럽 국가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이다. 역사적으로 예테보리는 17세기에 튼튼한 요새로 건설되면서 네덜란드 무역 식민지가 되었다. 스칸디나비아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가장 큰 배수 유역인 예타강 하구에 있어 18세기에는 스웨덴 동인도 회사의 본거지였다. 

  예테보리항은 스웨덴 대외교역의 약 30%를 담당하고 있으며, 덴마크의 코펜하겐과 노르웨이 오슬로 사이에 위치하여,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산업 생산의 약 70%를 점유하는 산업도시로의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다. 예테보리시 전역에 걸쳐 자동차, 정보통신, 물류, 의료, 해양 및 환경 등 첨단산업 클러스터가 조성되어, 스웨덴 대표기업들의 본사가 다수 위치한다. 볼보자동차 본사 역시 이곳에 있다.     


  커튼을 열자, 백야는 사라지고, 밝은 아침의 태양이 아름다운 예테보리를 비추고 있었다. 거리에는 많은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차량도 신호등에 걸려 있다 신호가 바뀌면서 빠른 속도로 어디론가 달려갔다. 출근 시간의 한국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지만, 스칸디나비아 산업 중심지의 역동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는 듯했다.

  호텔 근처에 있는 바이어 사무실로 약속 시간에 맞춰서 갔다. 업무적으로 많은 교신을 했지만, 처음 만난 그녀 표정에는 오래된 친구를 맞이하는 친근감이 보였다. 그녀의 당당한 모습에 여자라는 선입견은 사라지고, 젊은 사업가라는 인상이 강하게 다가왔다. 사전에 보내 줬던 방문 목적 등 어젠다에 대해서 협의 후, 그녀가 제시한 이틀에 걸친 일정에 적힌 첫날 저녁 음악회 초청은 생각지도 못했던 선물이었다.          

  예테보리 공항은 저녁 8시인데도 아직 밝았다. 늦은 시간에도 대부분 출장으로 온 듯한 사람이 많이 있었다. 출국 전광판에는 늦은 시간까지 출국 시간이 빽빽하게 있었다. 백야라서일까 잠시 생각해 봤지만, 예테보리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미래를 향해서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종일 하얀 하늘이 자연스러울 수 있을 것이다. 비행기가 백양의 하늘을 향해 치솟고 있었다.

 40여 년 전 잊히지 않는 첫 출장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회사가 세계로 뻗어나갈 때 입사해서 세계의 발전상을 직접 눈으로 보았다. 예테보리는 한국과 같은 선상에서 출발한 도시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예테보리의 현재 발전상을 보면, 아직도 우리가 모르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날 밤, 그녀가 초대한 음악회에서 흐르는 선율이 백야에 퍼져나가는 순간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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