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이야기 / 에세이
한국의 국적을 가진 남자로서 90% 이상은 국방의 의무를 수행했을 것이다. 개인 사정으로 면제를 받은 사람들도 군대 생활에 대해서 주변에서 귀 아프게 들었을 것이다. 군 복무 기간은 가정 형편과 교육 상황과 관계없이 누구나 동등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물론 일부는 소위 ‘열외’라는 군 용어에 충실했겠지만, 훈련소에서의 모든 과정을 거쳤다면 군 생활의 절반은 마친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본적지에서 입영하던 시절에는 거리가 먼 입영자들은 하루 전에 현지에 갔다. 아끼던 머리를 자르고 눈물을 흘리며, 밤을 지새우던 기억이 떠오른다. 입영 장소 입구에서 헌병들이 눈을 부릅뜨고 째려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저곳으로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했다. 어리둥절한 햇병아리들이 연병장에 모여 어색한 모습으로 동병상련을 느끼면서 서로를 위로하는 눈동자들만 보였다.
훈련소에 투입되기 전에 수용연대에서 어슬렁거리다 군복을 받는 날, 자그마한 박스에 입고 온 옷을 싸서 집으로 보내며 느꼈던 서글픔은 이제 추억으로 남아 있다. 훈련소에서 통제된 자유로운 영혼들은 기계적인 생활을 시작하면서 ‘억압’이라는 단어를 수없이 외쳤다. 6주간의 생활은 전투사격장의 총알처럼 지나갔다. 까무잡잡한 군인으로 탈바꿈한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닭똥 같은 눈물로 군가를 외쳤다.
군대에서 보직은 운이라고 했다. 물론 그런 운이 예정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솔직히 군대는 자기 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한다. 신체적 조건을 우선으로 보는 부대는 많지 않았다. 그런 부대는 군기가 엄하고, 고강도 훈련을 했기에 되도록 피하고 싶어 했다. 거기에다 100가지가 넘는 체크리스트에 문제가 없어야 하고, 신원 조회까지 하는 엄격한 부대로 내가 배치받았다는 것은 우월감보다는 책임감이 더 앞섰다.
훈련소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내린 곳은 눈에 익은 기차역이었다. 누구나 바라는 것이 집에서 가까운 부대였다. 버스에 탑승해 머리를 박고 어딘가에 내린 곳은 그 부대의 교육대였다. 첫날부터 교육이 힘들어 못 받겠다고 했지만, 일주일간의 교육은 그렇게 끝이 났다. 훈련소의 몇 배나 힘든 교육은 군인으로 거듭 태어난 느낌이 들었다, 배치된 곳은 날씨가 좋은 날에는 집이 보였다.
그곳에서 군대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따블백(더플백)을 제일 끝자리에 풀면서, 내무반 고참들의 눈초리에 일희일비(一喜一悲)했다. 소속은 사령부였지만, 특수 임무로 막사(생활관)는 산 중턱에 있었다. 밤에 보초를 서면서 환한 시내 야경을 보면, 부대에 둘러 쳐져 있는 철조망이 커다란 벽으로 느껴졌다. 자유로웠던 시절이 그립기도 했지만, 밖에서 벌어지는 시국이 안타까웠다.
군대 생활 동안 밖에서 벌어졌던 일은 역사의 한 페이지 분량을 뛰어넘었다. 대통령의 시해 사건과 연이어 벌어지는 12·12 사태 그리고 5.18 민주화운동으로 극도의 혼란기였다. 연속적인 비상사태로 외출, 외박은 물론 금지되었고, 신문, 방송도 볼 수 없었던 암흑기였다. 24시간 출동대기, 폭동진압훈련 등으로 항상 단독군장하고 다녔다. 같은 부대끼리 벌어진 전투 상황은 피아식별이 되지 않은 극한 사태로 번질 뻔했다.
군복무 기간 동안 4명의 사령관을 모셨다. 그중에는 대통령이 되거나 장관들이 되기도 했다. 군의 정치적 문제만 없었다면, 4명 모두 훌륭한 장군이었고 국민에게 존경받을 수 있었던 분들이다. 사병 출신의 사령관, 명상 음악을 튼 채 취침 점호를 했던 사령관, 영어에 능통해 외국 목사가 오면 통역 없이 장병들과 같이 목회했던 문무를 겸비한 사령관 그리고 학교 선배로 국방부 장관을 지냈던 사령관이 그분들이다.
군대 생활 중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후임병(조수)의 순직이다. 유격훈련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침 구보 시간에 갑자기 쓰러졌다. 의무병과 사령부 의무실로 그를 데리고 갔으나, 상황이 악화하여 수도통합병원으로 이송하는 과정에서 순직했다. 그를 동작동 현충원에 안장했다. 얼마 전 현충일에 그를 보러 갔을 때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했다. 졸업 후 입대한 대학 선배였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한국은 특성상 국방의 의무를 진다. 이스라엘에도 남녀가 군 복무를 한다. 이스라엘에서 근무할 때 저녁에 커다란 쇼핑몰에 가보면, 많은 군인이 비상 상황을 대비해 총알이 장전된 무기를 소지하고 다닌다. 그들이 ‘디아스포라’로 떠돌아다녔던 세월을 생각하면 국가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 국가가 있기에 국민이 있고, 그 나라를 결국 국민이 지켜야 한다. 현충일에 국기를 달면서 내 땅에 떳떳한 국민으로 산다는 것이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