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이야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책에 빠져들었다. 사춘기의 혼란스러운 정체성(Identity)에서 마음을 다잡기 위한 출구 전략이었다. 누나가 추천해 준 방대한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여름방학 동안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서, 그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별빛이 흐르는 밤을 지새우고, 동녘의 붉은 태양이 떠오르고 다시 어두워지면 어제 보았던 별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프루스트는 우리의 자아(自我) 즉, 정체성이란 시간 속에 매몰되면서 해체된다고 믿었다. 그는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우리의 사랑이나 고통에서 남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그의 작품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삶이 아니라, 삶을 체험했던 사람이 바로 그 삶을 기억하는 방식으로 삶을 기술하였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자기 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아가는 과정을 '의식의 흐름' 기법을 통해 그렸다.
푸르스트가 추구하는 진정한 ‘자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궁금했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디로 왔으며,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등의 물음에 관한 생각이 깊어져 갔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주목적인 심리학을 공부하기로 진로를 결정했다. 임상심리학을 전공하기로 마음을 먹고 나니 대학 선택은 어려움이 없었다. 유럽에서 임상심리학으로 학위를 받은 교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심리학 개론 전공 필수 첫 시간에 TV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하버드의 공부벌레들(The PAPER CHASE)’의 킹스필드 교수를 만났다. 강의 시간 전 미리 와서 탁자에 선 채로 책을 보고 있는 모습에 선배들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교수는 시간이 되자 강의실 문을 닫으라고 했다. 지각을 세 번 하거나, 리포트를 세 번 내지 않으면 강의실 들어 올 필요가 없다는 경고를 인사의 말로 대신했다.
두꺼운 원서로 강의하는 시간은 지옥 같았고, 볼펜 돌리는 소리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는 폐소공포증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강의는 토론과 리포트가 주가 되었다. 유럽에서 공부한 교수답게 자유로운 토론을 유도했기에 공부하지 않으면 강의 시간에 버틸 수가 없었다. 리포트의 분량도 많아서 밤을 지새우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그러다 늦잠을 자면 문이 굳게 닫힌 강의실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심리학에서 제일 먼저 배우는 학습이론이 있다. ‘파블로프의 개 조건반사 실험’을 통해서 설명되는 S-R 이론이다. 학습이 어떤 자극(stimulus ; S)에 대해 어떤 반응(response ; R)이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교수의 강의법이 바로 이런 식이었다. 학습이론에 의해서 길들여진 학생들을 통제하고, 학습 성과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간 개념이다.
교수의 강의법에 적응하면서 열심히 공부한 대가는 교수가 논문으로 평가를 해주었다. 시간의 강박관념이 생긴 것도 이 무렵이었다. 논문 제목이 ‘학습된 무력감의 영향에 대해서 (The effect of learned helplessness)’이었는데, 뭘 해야 할 시간이 되면 가슴이 뛰고, 손에 땀이 나는 것이다. 처음에는 논문을 준비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줄 알았지만, 점점 증세가 심해졌다.
무기력증(Lethargy)은 산업화 과정이나 일상생활에서 반복적인 일을 하면서 생길 수 있는 초기 우울증의 한 증상이다. 이런 증상은 행동의 제한이 생기며, 자기부정을 해버린다. 면역력이 약해져서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커지며, 식욕의 제어가 안 된다. 피로감을 많이 느껴 사람들과의 교류가 줄게 된다. 마음이 조급해지면서 어떤 일에 과민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가정 형편으로 더 이상 공부 할 상황이 못되어 회사에 취직했다. 심리학을 배우면서 느꼈던 것을 회사생활에 잘 적용해서 열심히 일했다.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극복하고, 주변에 동료들이 그런 문제가 생기면 상담을 해주면서 해결하도록 도와주었다. 심리학에 빠지게 만든 푸르스트를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정체성이 시간 속에서 매몰되어 해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