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추억 여행을 한다. / 에세이
알프스 산맥이 아드리아해로 뻗어가면서, 그 끝자락, 해발 500m 평원에 조용한 도시 사라예보(Sarajevo)가 있다. 도시를 흐르는 밀랴츠카강(Miljacka)에는 여러 개의 다리가 있고, 그중에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어 역사적으로 유명한 프린치프 다리(Principov most)가 시내 중심에 놓여있다. 이 다리의 이름은 유고 내전이 끝나면서 현재의 이름인 라틴교(Latinska ćuprija)로 바뀌었다.
도시를 돌면서 유고 내전 중에 참혹한 모습들 연상케 하는 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보였다. 부서진 건물 벽에는 총탄 자국들이 즐비했고, 거리에 빨간색으로 혈흔을 상징하는 ‘사라예보의 로즈’는 그 당시의 상황을 연상할 수 있었다. 공원묘지에는 수많은 하얀 비석들이 파란 하늘에 덮여 있었고, 집단 학살자들을 위한 추모 조형물들이 묵묵히 그날을 생각하며 서 있었다.
도시 중심가에는 100여 년간 무슬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터어키인, 유태인, 또 다른 민족들이 평화롭게 공존했던 흔적으로 다양한 건축 양식의 건물들을 볼 수 있었다. 그중에 이슬람 사원이 눈에 들어왔다. 유고 내전의 가장 큰 아픔을 겪은 무슬림들의 영혼이 아직도 숨 쉬고 있는 그곳에 손과 발, 얼굴을 닦고 들어가서 묵상(黙想)을 했다. 그리고 30년 전 일을 떠올렸다.
처음 사라예보를 방문한 것은 유고 내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보스니아의 경제부총리가 한국을 방문해서 전후 복구사업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다. 근무하던 회사에서 현지 조사를 통해 지원 가능성 및 분야를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의 눈에 절실함이 가득 찬 모습이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다.
새벽에 비엔나에서 사라예보를 가는 비행기에는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들은 이야기로는 사라예보가 새벽에 안개가 많이 끼고, 알프스 산맥에서 급강하해서 착륙하는 지역이라 회항(回航) 율이 높다고 했다. 가장 리스크 한 것은 수동착륙 유도장치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기장의 안내방송이 시작되면서 승객들은 안전띠를 꽉 조여매고 눈을 감고 있었다. 기내에는 적막감과 공포감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랜딩기어 소리가 들리면서, 지상과 충돌하는 소리와 함께 기내에서는 환호와 박수소리가 동시에 터졌다.
3년간의 내전은 사라예보를 수동적인 중세도시로 만들어 놨다. 승객을 맞이하는 공항 직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보이지 않았다. 정부 직원들이 제일 먼저 한 말은 여기서 절대 웃지 말라(never smile)는 것이었다. 차를 타고 공항을 나서자, 그 직원의 말이 현실로 다가왔다. 눈이 내린 것처럼 수많은 하얀 십자가들이 끝없이 들판을 덮고 있었다. 거리에 있는 건물들은 시커먼 연기로 얼룩져 있었고, 반 조각이 났거나 지붕이 없는 건물들이 즐비했다.
통역 담당으로 동행한 여직원의 얼굴에는 어두움이 깔려 있었다. 그녀는 전쟁이 나자 해외에서 공부하다 사라예보로 돌아와 가족과 고통스러운 3년을 보냈다. 아버지는 경찰로 근무하다 세르비아 점령 시 처형당했고, 어머니는 2년 전 세르비아 저격수(sniper)의 총에 맞아 지금도 혼수상태에 있다.
그들의 만행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하거나 해외로 떠나서 인구의 절반만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경제기획부에서 근무하는 그녀의 걱정은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전후 복구사업에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불안감이었다. 가장 시급한 것은 산업 인프라스트럭처의 복구사업이었다.
며칠간 전국의 주요 시설을 돌아보면서, 그녀가 했던 말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그녀로부터 가족을 갈라놓은 것은 인간들이 파 놓은 무덤이었고, 죽고 죽이는 전쟁 속에 남는 것은 결국 그들의 상처뿐이었다. 뿌리 깊은 무의미한 전쟁은 그들의 나라를 송두리째 뺐어가,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영혼뿐이었다.
이슬람 사원에서 묵상을 마치고 나오는데, 그녀의 마지막 말이 바로 어제 같은 감정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녀의 눈물이 아직도 메마르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