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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니즈니노브고로드의 아침

나는 추억 여행을 한다. / 에세이

by 김창수

모스크바에서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1시간 여 지나 니즈니노브고로드(Nizhny Novgorod)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이라 공항은 한산했다. 멋있는 유니폼을 입은 공항 직원들이 방문객들을 밝은 모습으로 맞이해 주었다. 공항 밖으로 나가면서 늦가을 날씨의 차가운 바람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얼어붙게 했다. 러시아 날씨에 경험이 없다면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래전 처음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에는 겨울이었다. 슬라브족의 전형적인 새하얀 피부의 검색대 세관들의 싸늘했던 인상이 무서웠다. 모자에 빨간 별을 달고 있는 그들을 보면서 입국장으로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거리에는 백열등 불빛이 벌겋게 퍼져가고 있었고, 쌓인 눈에서 반사되는 형체들이 을씨년스러웠다. 러시아의 첫인상은 그랬다.

오랜만에 밟은 러시아 땅은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어두웠던 조명들은 네온사인으로 바뀌었고, 마주치는 러시아인들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생필품이 부족해서 줄을 섰던 사람들에게 이제는 자유롭게 화려한 마켓들이 기다리고 있다. 니즈니노브고로드는 러시아 변혁기의 역사를 대변할 수 있는 가장 러시아다운 매력을 가진 새하얀 도시이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는 순수 슬라브 혈통의 공산당원 엘리트들만 이 도시에서 거주할 수 있었다. 어디를 가나 백색의 도시처럼 깨끗했고, 거리에는 차가워 보이면서 도도함이 흐르는 선택된 인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러시아의 또 다른 작은 러시아, 허가 없이 들어갈 수 없었던 도시였다.

니즈니노브고로드는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러시아의 군수 공장이 집중돼 있어 독일의 대규모 공습과 포격에 도시가 파괴되었다. 전쟁 후에는 소비에트 연방의 군수기지로 연구 및 생산 시설 보안을 위해 외국인 및 내국인에게도 도시 전체가 폐쇄되었다.

러시아의 대표적인 고리키 자동차 공장(GAZ)에서는 군용차들과 지금은 사라진 공산권의 고급 세단형 승용차인 ‘볼가’(Volga)도 이 공장에서 생산되었다. 크라스노예 소르모보(Красное Сормово) 조선소에서는 핵잠수함이 건조되었다. 항공기 제조 회사인 소콜(Сокол)사에서는 북한의 주력 전투기인 야크기(Yak機)가 지금도 생산되고 있다.


원래 이 도시의 이름은 1932년 이곳 출신 작가 막심 고리키(Maxim Gorky)의 이름을 따서 ’ 고리키’로 명명되었다. 1990년 옛 이름을 되찾았으면서, 도시의 폐쇄 상태에서 벗어났다. 처음 이 도시를 방문했을 때였다. 오래된 궁을 개조한 호텔에서 방이 너무 커 잠 못 이루고,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두터운 커튼을 통해 들어오면 이불을 감싸 덮어야 했던 기나긴 겨울밤이 떠오른다.

이 도시에는 1917년 설립된 ‘니즈니노브고로드 언어대학교’가 있다. 지금은 외국인들의 러시아 교육 중심 대학으로 자리 잡았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5년제였던 이 대학 출신들은 완벽한 세계 여러 나라의 현지어 수준의 실력을 갖추어 졸업 후, 공산진영 국가들에 통역병 등으로 파병되거나 KGB 등에서 근무하며 냉전시대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었다. 소련 붕괴 후 정부, 기업 등 외국인들과의 협력 조직은 주로 이 대학교 출신들이 자리 잡고 있어서 이대학 출신들을 ‘고리키 마피아’라고 불렀다. 그들은 러시아 개방의 최전선에서 핵심적인 일을 하였다.


긴 비행시간과 늦은 시각 호텔 체크인으로 피곤했다. 호텔은 오카강과 볼가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었다. 방안에 커튼을 열자 강변으로 흐르는 불빛들이 강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저 멀리 별똥별이 강으로 사라졌다. 잠이 오지 않아 가져 온 고로키의 소설『가난한 사람들』을 펼쳤다.

니즈니노브고로드를 다시 방문한 이유는 바로 고로키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그는 러시아의 격동기에 어려운 삶을 통해서 그의 몸 안에는 러시아의 혼이, 그 중심에는 민초의 삶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해가 지는 걸 바라보며 생각한다. 만약 내일 해가 뜨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걸로 끝장이다. 우리는 영원한 어둠에 덮이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


어두웠던 시절을 보내며, 그는 하루하루를 내일의 해가 뜨기를 기다리며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내일 아침 해가 뜨면 고로키를 만나러 갈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내일 아침에도 밝은 태양은 뜰 것이다.’라고 말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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