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추억 여행을 한다. /에세이
몇 년간 여름휴가를 어김없이 캐나다의 작은 도시, 밴쿠버섬에 있는 나나이모로 갔다. 밴쿠버 공항에 내려서 BC Ferry를 타거나 소형 비행기를 이용하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에서 뿜어 나오는 깨끗한 공기로 전 세계 부호들의 별장들이 많다. 태평양 아열대 환류 영향으로 겨울에도 비가 내리는 온화한 기후의 섬이어서, 캐나다 동부에서 많은 은퇴자들이 정착해서 사는 곳이기도 하다.
섬에는 고급 주택들이 해변가를 중심으로 몰려 있고, 마리나(요트 정착장)에는 그들이 타고 다니는 다양한 요트들이 정박해 있다. 거리에는 오픈카들과 대형 오토바이족들이 우렁찬 엔진 소리를 내며 질주한다. 숲 속이나 해변의 캠핑장에는 다양한 캠핑카들이 가득하다. 겨울에는 눈 쌓인 설원에서 스키와 보드를 타고, 저녁에는 어두운 밤을 환하게 밝히는 캠프파이어의 불을 보면서 와인을 즐긴다.
날씨가 어두워지면, 가족과 넓은 가든에 불을 피워놓고 고기를 구워 먹는다. 그 냄새가 동네를 진동시키면서, 강아지들이 킁킁거리는 소리로 합창을 한다. 하늘에 있는 빛나는 별들을 보며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 어느덧 밤은 깊어가고 쏟아지는 유성들을 피해서 잠자리에 든다. 아침에 눈부신 밝은 햇살에 잠이 깨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 이곳이 신이 숨겨 놓은 마지막 지상의 낙원이 아닐까.
휴가 기간 중 빠지지 않고 매일 새벽에 골프를 했다. 많은 골프장들은 예약이 없어도 대기 명단에 올려놓으면 많이 기다리지 않아도 처음 보는 동반자들과 함께 라운딩을 할 수 있다. 가끔 2명이 편하게 치는 경우도 있다. 골프장들은 주로 주택가 중심에 있어서 동네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다. 젊은 골퍼는 백을 메고, 중년들은 핸드 카트를 끌고, 노인들은 카트를 타고 라운딩을 한다. 운동 삼아 핸드 카트를 빌려 18홀을 걸어 다녔다.
어느 날, 대기 명단에 올려놓고 연습장에서 열심히 운동을 하고 있는데, 마이크로 급하게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운영자가 앞 조가 예약이 취소되어 일찍 라운딩을 할 수 있다고 준비하라고 했다. 동반자는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인들이었다. 얼른 보기에는 동네 친구들 같았으나, 상호 간에 예의를 갖추었다. 나이에 비해정정해 보이는 그중 한 분이 다가오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왔다.
‘안뇽하셔요?’ 하면서 어눌한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어떻게 한국인인지 알았냐고 물어봤더니, 조금 전 누군가와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동네 사는 한국분과 인사하는 소리를 들은 듯했다. 한국어는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보니, 한국전쟁에 참가했다는 말을 건네 왔다. 순간, 온몸이 오그라드는 짜릿한 느낌으로 덮였다. 그러면서 ‘방가와요.’하는 그의 어렴풋이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어에 활짝 웃으면서 미소로 대신했다.
오래전 러시아에서 고려인을 만났을 때, 더듬거리는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그를 보면서 울적한 적이 있었다. 평생을 외지에서 보내 얼굴 모습만 한국인이지 모든 것이 러시아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국전쟁 참전을 했던 잊혀가는 기억을 가지고 있을 캐나다인에게 갑자기 울적한 기분을 느낀 이유가 뭘까. 부모들이 겪은 고통을 이해할 수 있듯이 그들과 같은 피를 나눈 고통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골프 라운딩을 마치고 클럽하우스에서 그들에게 점심을 대접했다. 아직도 가평전투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그분의 또렷한 말이 떠오른다. ‘많은 전우들을 한국 땅에 묻고 고국으로 돌아온 이후로, 나는 대한민국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어요. 폐허에서 캐나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훌륭한 나라에 내 젊음을 바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그의 눈동자에서는 오래 전의 한국 전쟁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국전에 참전했던 수많은 노병들이 세계 곳곳에서 아직도 한국전 참전을 자랑으로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캐나다도 약 3만 명의 육. 해. 공군을 참전시켜 500여 명 이 전사했다. 그중 일부는 부산 UN군 묘지에 묻혀 있다. 얼마 남지 않은 노병들 중 한 분을 만나 저미는 가슴을 억누를 수 없었다.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폐허가 되었던 한국을 방문하여 발전된 모습을 보면서, 그에게 스쳐 지나갔던 전우들과 영원히 함께 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