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군산오름에서 본 아픈 역사

나는 올레길을 걷고 있다 / 연작 에세이

by 김창수

나는 박수기정의 일몰에 얼마나 심취되어 있었는지 주변은 이미 어둠이 깔렸다. 배고픔이 몰려오면서 대평포구로 들어올 때 보았던 하얀 집의 이탈리아식당으로 들어갔다. 창가 앞에 앉아 불빛으로 화려해 보이는 빨간 등대를 보고 있는데, 주문했던 화덕에서 구워 나온 피자와 맥주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오늘 밤은 여독인지 모르지만, 넋이 빠진 채로 지내고 싶었다. 맥주잔의 거품이 파도의 포말처럼 보였다.

아침은 파도 소리에 눈을 떴다. 샤워는 또 하루를 여는 행위였고, 새로운 길을 맞이하는 의식이었다. 커피에 따뜻한 우유를 듬뿍 넣어 마시며, 창가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빨간 등대는 햇빛을 받아 아름다워 보였고, 박수기정은 또 다른 남성미를 뽐내고 있었다. 새벽에 정적을 깨기 싫어 조용히 게스트하우스를 나왔다. 어제 도착 스탬프를 찍었던 파란 간세에서 9코스의 시작 스탬프를 찍고, 군산오름으로 향했다.


나는 소나무가 무성한 산길을 따라 가파른 오르막을 걸으면서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100m가 넘는 박수기정 꼭대기에는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 채, 어제 황홀했던 노을을 찾아서 힘을 냈다. 무박 2일로 설악산 다닐 때가 생각났다. 어두컴컴한 이른 새벽에 눈을 비비며 전세 버스에서 내려 오색 약수에서 등산용 헤드랜턴 켜고 올라갔었다. 잠시 뒤를 바라보니, 대평포구와 해안이 어울려 춤을 추고 있었다.

평탄한 볼레길로 들어섰다. ‘볼레’는 제주 방언으로 마을 길을 의미하는데, 전통적인 제주 돌담길과 귤밭이 있는 길이다. 이어서 한적한 숲길을 만나 인적이 드물어서인지 신비롭기까지 했다. 이곳부터 군산오름이 시작되는 줄 알았지만, 한참을 가서야 표지판을 만났다. 그런데 그 표지판에는 ‘진지동굴 탐방로(85m)’로 적혀 있었다. 그곳이 궁금했지만, 앞에는 지옥으로 가는 계단이 끝없이 펼쳐지면서 걱정이 앞섰다.


나는 ‘8 진지동굴’로 들어갔다. 입구는 좁았지만, 내부에는 방처럼 넓은 공간이 있었다. 1945년, 일본군은 방어 군사작전으로 미군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 시설로 제주 전역에 448개의 진지동굴을 구축하였다. 그들은 수많은 제주도민을 강제 동원하여 맨손으로 곡괭이만을 가지고 바위에 굴을 만들었다. 진지동굴을 나오면서 이런 참상을 생각하면, 다시는 역사적 비극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산오름 정상에 오르면서 동굴에서 꽉 막혔던 아픔이 확 풀리면서 마음의 위로가 되었다. 푸른 하늘은 서귀포 바다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남쪽으로 저 멀리 어슴푸레 보이는 마라도, 북쪽에는 좋은 날씨에만 볼 수 있는 한라산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서쪽의 산방산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었다. 파란 간세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고, 조랑말 등같이 생긴 의자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 속에서 제주도의 아픔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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