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읽기 14권
12-13권에서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수많은 전투장면이나 이름을 따라가기 벅차다. 호메로스의 책은 음악과 같아서, 꼭 쉼표가 있다. 14권을 읽으면서 오아시스를 만난 느낌이었고, 상상력이 얼마나 풍성하던지 충분한 쉼을 얻었고, <일리아스> 책을 읽기가 좀 벅차기도 했는데 14권을 읽고 재미있어서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년기 시절에 TV 선전에 '사랑의 비너스', 여성 속옷 선전이 있었다. 14권의 제목은 '사랑의 비너스'와 연관이 된다. 비너스는 아프로디테의 로마식 이름이다. 아프로디테는 '웃음을 사랑하는 비너스(Laughter-loving Venus)'라고 호메로스는 표기한다. 웃기만 잘해도 예뻐서 그런가 보다. 비너스에게는 '거들(girdle)'이란 비밀병기가 있어서 그에게 넘어가지 않는 존재가 없었다. 후대 예술가들은 '사랑의 비너스의 그 비밀병기'를 거들인지, 브래지어인지, 목걸이인지 다양하게 표현했다. 번역에 '가슴띠(breastband)', '속옷(girdle)'이라고도 했다. 헤라가 제우스를 유혹해서 전쟁에서 눈을 돌리게 하려면 '비너스의 비밀병기'를 빌려야 했다. 비너스의 비밀병기의 이름은 '케스토스(Cestus, 비너스의 거들)'이다.
헤라가 '사랑의 비너스'의 마법의 그것을 빌려 입으니 효과가 확실했다. 제우스는 '지금까지 이렇게 달아오른 적이 없다. 이런 느낌 첨이다(I’ve never been so turned on in all my life).'고 말하고 헤라와 달콤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사이에 포세이돈은 궁지에 몰린 그리스를 마음껏 편들어서 기세를 반전시킨다.
막사에서 네스토르가 부상을 입은 마카온을 치료하다가, 옆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병사들의 함성이 점점 거세져서 편안하게 술잔을 기울일 수가 없어서, 밖에 나가서 전세를 살펴보겠노라고 마카온에게 나간다. 아들 트라시메데스(Thrasymedes)가 아버지 반짝거리는 방패를 들고나가서 아들의 방패를 집어 들었고 또 한 손엔 청동창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종종 아들이 아버지의 오토바이나 자동차를 가지고 나가는 경우가 떠올랐다. 그리스군의 비참한 모습이 보였고 방어벽은 함락되어 있었다. 네스토르는 싸움터로 달려갈까, 아니면 아가멤논 왕을 찾을까 하다가 부상을 입은 왕을 찾아가기로 했다.
아카이오이족의 지도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네스토르 빼고 모두 부상을 입은 처참한 처지이다. 원로 네스토르, 총사령관 아가멤논,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오디세우스, 젊지만 용맹한 디오메데스 이들의 대화를 들어보자. 먼저 아가멤논이 네스토르에게 절망적인 심정을 토로한다. "네스토르시여, 난 헥토르가 전에 장담했던 말이 실현될까 두렵소. 우리 함대를 불태워버리고 우리를 죽일 때까지 트로이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트로이군에게 장담했었소. 많은 그리스군이 아킬레우스처럼 나에게 화가 나서 배 뒷전에서 싸우기를 거부하고 있소." 네스토르가 말한다. "전하, 맞습니다. 믿었던 성벽까지 함락되었습니다. 트로이군이 쉴 틈을 주지 않고 진격합니다. 언제 완전히 무너질지 모릅니다. 위태한 형국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전쟁에 참여할 형편은 아닌 것 같습니다." 네스토르는 90세쯤 되는 원로이고, 나머지 장수들은 부상을 입었기 때문이다. 이때 아가멤논은 후퇴하자는 제안을 한다. "참호와 성벽이 무너졌으니 이 또한 제우스 신의 뜻입니다. 함대를 물 위에 띄워놓고 밤이 되면 도망갑시다. 잡혀 죽는 것보다 도망쳐 생명을 구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젊은 장수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는 반대하고 나선다.
율리시스: 전하, 무슨 말씀입니까? 전하는 저급한 군대를 지휘해야 할 수준이지, 목숨을 바쳐서 싸울 운명을 제우스에게 받은 우리들을 통솔할 인물이 못됩니다. 지금까지 승리를 얻고자 싸웠는데 트로이로 돌아가자는 게 말이 됩니까? 말씀을 삼가십시오. 전하의 판단을 저는 경멸합니다. 그런 비겁한 행동은 오히려 파멸을 자초하는 짓입니다. 함대가 떠나는 것을 본 그리스군 병사들이 공격을 멈추고 함대로 시선을 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가멤논: 꼭 그렇게 하자는 뜻은 아니고 더 좋은 의견들이 있으면 말씀해보시오.
디오메데스: 바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멀리서 좋은 의견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들 가운데 내가 가장 젊다고 아무도 화내지 않겠다면 말하겠소. 우리 집안을 투사의 혈통을 이어받았소. 내가 옳은 말을 하는데도 내 말을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오. 자, 싸움터로 나갑시다! 부상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우리가 나가야 싸우지 않는 병사들까지도 격려할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싸움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아가멤논이 선봉에 서서 나간다. 이때 포세이돈이 제우스의 모습을 피해 '늙은이'로 변신해서 아가멤논의 오른손을 잡고 이렇게 말하며 격려한다.
지금 아킬레우스가 꼴 보기 좋다고 좋아할 것이다. 신들도 그런 아킬레우스에게 분노하실 것이지만, 그러나 그대 아가멤논은 좋아하고 있으니 그대가 트로이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오. 힘을 내시오.
말을 마친 포세이돈은 벽력같은 함성을 지르며 평원을 질주하니, 9,000 또는 10,000 명의 병사들이 외치는 함성과 같은 소리라 울려펴져 그리스군의 사기를 북돋았다. 신들이 인간을 만날 따는 반드시 인간이나 인간이 친밀하게 느낄 동물로 변신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황금 왕관을 쓴 헤라가 올림포스 상봉에 서서 이를 지켜보다가 포세이돈의 활약을 좋아한다. 헤라가 이다(Ida)산 정상에 앉아 있는 제우스를 보고 싫증을 느꼈다. 제우스를 유혹해서 잠들게 하여 전쟁을 더 이상 주관하지 못하게 할 계책을 세웠다.
'제우스가 단잠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면, 그의 시선과 지각을 속일 수 있겠지'
이때부터 헤라는 아름답고 향기롭게 치장을 하고 남편 제우스를 유혹해내려고 합니다. 목욕을 하고 향수를 바르고 머리털을 땋았다. 아테나가 멋지게 만든 향기로운 의상을 몸에 두르고 황금 브로치를 가슴에 단다. 백 개의 술이 달린 허리띠, 오디 모양의 구슬이 달린 귀걸이, 머리에는 빛나는 아름다운 면사포를 쓰고, 아름다운 샌들을 발에 매었다. 헤라가 아프로디테에게 '케스토스'를 빌려달라고 한다.
사랑스러운 아프로디테야, 내 청이 있다. 들어주겠니? 너는 트로이 편 나는 그리스 편이라고 거절하겠니?
두 번째로 아프로디테의 도움을 요청한다. 아프로디테는 가능하면 들어드릴 테니 원하는 것을 말씀하시라고 말한다. 헤라는 꾸며서 말하기를 '나에게는 양부모와 같은 오케아누스와 테티스 부부의 불화를 잠재우고 화목한 부부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비너스의 매력(spell)'을 빌려달라고 한다. 그게 거들, 허리띠, 가슴싸개 등 번역이 분분하다. 아프로디테는 제우스를 모시는 헤라의 요청을 거절해서도, 할 수도 없다고 말하며 청을 들어준다.
웃음을 좋아하는 아프로디테(Laughter-loving Venus)는 다채롭게 수놓은 띠(케스토스)를 풀어서 헤라에게 주었다. 이것에는 매력의 원천인 사랑(love), 갈망(desire),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달콤한 속삭임(flattery)이 들어 있었다.
세 번째로 헤라는 히프노스(Hypnos, 잠의 신)에게 가서 제우스를 잠들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한다. 그 보상으로 헤파이스토스가 헤라에게 준 '황금옥좌'를 주겠노라고 했지만, 히프노스는 거절한다. '다른 신은 몰라도 제우스에게는 안된다'고 한다. 예전에 한번 헤라가 '헤라클레스의 일'로 제우스를 잠재워달라고 부탁해서 그렇겠다가 큰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헤라 여신은 잠의 신을 다시 설득합니다. 첫째, 그때 제우스가 화를 낸 것은 헤라클레스가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화를 낸 것이고 이번 트로이 전쟁에 관해서는 그때처럼 화를 내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하는 것이었다.
둘째, 히프노스가 그렇게 사모하는 그라티아이(Gratiae) 가운데 한 명인 파시테에(Pasithea)를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한다. 그 증표로 스틱스 강물을 두고 맹세하고, 크로노스 신과 더불어 사는 모든 신들이 증인이라고 한다. 이에 휘프노스는 좋아라 하고 헤라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그라티아이는 현대영어로 그레이스(Grace)이다. 그라티아이(Gratiae)은 카리테스(Charites) 같은 사람이다.
헤라가 이다산의 정상 칼카로스에 이르렀다. 휘프노스, 잠의 신도 이곳에 이르러 음성이 고운 새(bird)로 변신해서 가장 높은 소나무 위에 앉았다. 제우스가 헤라를 보다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이전에는 늘 시큰둥하게 본처를 바라보았는데, 이번에는 처음에 사랑을 나눌 때의 그런 감정이 일어났다. "어쩐 일이시오?" "오케아누스와 테티스 어머니를 방문하러 갈까 합니다." 헤라가 이렇게 둘러대자, 후끈 달아오른 제우스는 "거기는 다음에 방문하러 가고 지금은 나랑 달콤한 사랑을 나누자"고 한다. 맨날 바람만 피우던 제우스가 본처 헤라에 대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장면에서 웃음이 난다. '사랑의 비너스'(케스토스)를 두르고 나타난 헤라에게 제우스가 욕정을 느끼는 이 대목을 인용한다.
"헤라시여, 일찍이 여신이나 여인에 대한 애욕이 이처럼 강렬하게 내 가슴속을 사로잡힌 적은 한 번도 없었소. 영웅 페르세우스를 낳아 준 날씬한 발목을 지닌 딸 다나에, 미노스와 라다만토스를 낳아 준 에우로페, 디오니소스를 낳아준 테베의 세멜레, 사자의 심장을 지닌 아들 헤라클레스를 선사한 알크메네, 데메테르, 아름다운 레토, 그대를 사랑했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소. (이런 느낌은 처음이오.) 그만큼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하며 달콤한 욕망이 나를 사로잡는구려."
헤라는 교태를 부리며 모든 신들과 세상이 다 보는 이곳에서 사랑을 나눌 수는 없고, 제우스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하면서 빼는 체를 한다. 그러면서 헤파이스토스가 지어준 헤라의 방, 한번 들어가면 누구도 맘대로 나올 수 없다는 그 방으로 가서 문을 단단히 잠그고 사랑을 나누자고 한다. 급해진 제우스는 이동할 틈도 없이 부인을 품에 안으니 땅은 풀과 꽃으로 침대를 만들고, 그들이 눕자 금빛 구름이 그들을 감싸서 아무도 보지 못하게 하고, 이슬방울이 빛을 발하며 떨어진다. 헤라의 품에 파고든 제우스는 잠이 든다. 헤라의 계획이 성공했다.
헤라의 부탁으로 제우스를 잠재운 휘프노스는 포세이돈에게 가서 이 사실을 전하면서, 포세이돈이 제우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그리스군을 도와서 승리를 안겨주라고 말한다. 포세이돈은 큰 칼을 들고 그리스 군을 격려한다. 이제 전세는 역전되어 트로이군이 밀리게 된다.
포세이돈이 앞장서니 부상을 당한 장수들 디오메데스, 오디세우스, 아가멤논도 다른 병사들을 격려하고 무장을 정비하도록 한다. 한편 헥토르도 트로이 전열을 가다듬는다. 포세이돈이 그리스군을, 헥토르가 트리이군을 지휘하고 싸운다. 헥토르와 아이아스가 다시 대면했다. 헥토르가 먼저 창을 아이아스에게 던졌으나 빗나갔다. 아아아스는 큰 돌을 들어 뒤로 물러나는 헥토르에게 던져서 그의 목을 명중시키자, 헥토르가 빙그르르 굴러가고 청동 갑옷은 댕그렁 소리를 냈다. 헥토르가 쓰러지는 모습이, 참나무가 벼락을 맞아 쓰러지는 모습 같았다. 그러자 양진영에서 헥토르를 끌어가고자 엄청난 접전을 벌였으나, 트로이 장수들 - 폴리다마스, 아이네이아스, 아게노르, 사르페돈, 글라우코스 등- 이 사력을 다해 그를 지켜내고 후방으로 호송했다.
트로이의 강을 인간은 스카만데르(Scamander), 신들은 크산토스(Xanthos)라고 부른다. 부상당한 헥토르를 크산도스 강 하구로 데려가 전차에서 내려 땅 위에 눕혔다. 헥토르에게 크산도스 강물을 끼얹으니 그는 다시 숨을 몰아쉬다가 눈을 크게 떴다. 무릎을 꿇고 일어나 앉더니 피를 토했다. 곧바로 다시 땅 위에 누워 정신을 잃었다.
헥토르가 떠나자 수많은 트로이 장수들이 죽음을 당한다. 죽고 죽이는 장면과 사람들의 이름이 나열되고, 다시 전세는 그리스군이 우세한 쪽으로 흘렀다. 14권의 주인공은 단연 헤라 여신과 포세이돈 신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