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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Nov 28. 2021

정신을 차리게 한 은사님

사랑과 영혼의 철학자 5

스승 폴 뮐러의 대속의 죽음


키르케고르는 《불안의 개념》(1844)을 고인이 된 폴 묄러 교수에게 헌정하였다. 1836년 6월 4일 하이베르그(J.L. Heiberg)를 위한 리셉션에 갔을 때, 위에 인용한 말을 폴 묄러 교수가 했다. 순간 키르케고르가 열 받아서 총으로 자신을 쏘려고 했던 극도의 감정을 느꼈나 보다.


폴 묄러 교수는 키르케고르에게 진지한 관심과 증오를 가지 내뱉은 말인데, 키르케고르는 집에 돌아와 자기가 뭘 위해 이렇게 논쟁적인지 깊은 반성에 빠졌다. 변증 할 진리도 없이 그저 즐기기 위한 논쟁을 일삼았을 뿐임을 깨닫는다.


폴 뮐러 교수는 키르케고르가 1차 회심(1838년 5월 19일)을 하기 두 달 전인, 1838년 3월 13일 사망했다. 스승 뮐러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이라고 그는 믿었다. '부정의 화신'이었던 자신이 죽었어야 하는데, '긍정의 화신'이었던 폴 뮐러가 죽었다고 애도하며, 극심한 우울에서 벗어나 새로운 용기를 얻었다. 그것이 그가 1838년 5월 19일 아침에 회심을 체험하는 전조가 되었다. 키르케고르는 이 경고를 생의 마지막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게오르그 하만, 각성을 위한 두 번째 나팔


파멸의 길에서 키르케고르를 구해내는 일을 한 첫 번째 사람은 폴 묄러 교수였다. 폴 묄러 교수가 죽은 후에야 한층 더 강하게 그 나팔소리가 울려왔다. 이처럼 그의 각성은 스스로는 한계가 있고 외부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키르케고르가 종교적으로 각성하게 했던 인물은 따로 있다.


두 번째 나팔이 바로 요한 게오르그 하만(Johann George Hamann, 1730-1788), 반종교주의를 외친 계몽주의를 무너뜨리고 낭만주의의 출발점이 되는 무명의 독일 쾨니히스베르크 사람이다. 바로 칸트 동네 사람이고, 칸트의 합리주의에 대하여 메타비평을 가했던 사람이다.


헤겔에게 키르케고르가 있었다면, 칸트에게는 하만이 있었다. 키르케고르는 바로 하만에게서 소크라테스를 배웠고, 가명의 저술을 배웠고, 기독교의 진리에 대하여 확신하게 되었다. 하만은 아주 흥미로운 인물이며 새롭게 주목받는 인물이다. 이사야 벌린은 《낭만주의의 뿌리: 서구세계를 바꾼 사상혁명》에서 하만을 낭만주의의 출발이라고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괴테의 문학과 키르케고르에 미친 영향 등으로 계몽주의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한 이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무명의 인물 요한 게오르크 하만이었다."


하만은 칸트와 같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1730년에 태어났다. 칸트보다는 6살 어리다. 하만은 그곳의 대학에서 공부하며 계몽주의 정신을 받아들였으나 1757-58년 런던 출장을 가서 실패한 후에 회심을 하고 기독교 신앙에 심취한다.  이성이 아니라 신앙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된다. 그리고 칸트의 계몽주의를 반대하여 기독교의 신앙이 참된 지식의 길임을 역설한 무명의 사람이다.


위대한 사상가 데카르트에게는 무명의 비코(Vico)라는 사람이 있었고, 훌륭한 학자 칸트에게는 무명의 하만(Hamann)이라는 비판자가 있었다. 오늘날 비코와 하만의 사상에 주목한다. (자료: Three Critics of the Enlightenment: Vico, Hamann, Herder. Isaiah Berlin - Princeton University Press.)



하만의 《소크라테스 회상록》(1759)


"1836년 9월 10일은 키르케고르의 생애에서 주목할 만한 날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날에 비로소 하만을 친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월터 라우리)


하만은 그의 나이 29세 때 주목할 만한 책 《소크라테스 회상록(Sokratische Denkwϋrdigkeiten)》을 쓴다. 칸트의 나이 35세 때의 일이다. 이 책에 대한 안윤기 박사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출처: 안윤기, 「철학사 읽기 - 하만의 『소크라테스의 회상록』 연구-」, 한국칸트학회 논문집, 『칸트 연구』 제34집.)

이 책은 ···'이성의 화신'이자 '계몽주의의 우상'인 소크라테스를 하만은 도리어 예수의 길을 예비한 선지자요, 이성의 무지막지한 폭압에 맞서 신앙을 수호한 순교자로 그리고 있다.


키르케고르가 하만에게서 소크라테스를 소개받은 것일까? 아무튼 소크라테스는 합리주의와 계몽주의의 우상이었다. 그런데 하만은 소크라테스를 전혀 반대의 인물로 묘사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를 '이성주의의 영웅'이 아니라 '이성의 무지'를 폭로한 사람이자 이성의 비판자로 내세운다. 이 책은 '당대 독일 지성계를 주도하던 계몽주의에 대한 선전포고요, 18세기 후반 독일 질풍노도 운동을 선도하게 될 대일격'이라고 안윤기 박사는 소개한다.


하만이 키르케고르에게 어떤 사상적 영향을 미쳤는지는 다른 기회에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하만을 통하여 키르케고르가 결정적으로 종교적 각성을 일으킨 부분만을 다루고자 한다. 키르케고르에게 미친 하만의 영향력을 주장하는 학자로는 로날드 스미스(Ronald Gregor Smith), 떨스트럽(Thulstrup) 그리고 월터 라우리가 있다.



'깨어나라, 너 잠자는 자여!'


1836년 9월 10일 키르케고르가 일기에서 최초로 하만을 인용하고 있다(출처: 월터 라우리, 《키르케고르 평전》 183-84쪽). "깨어나라, 너 잠자는 자여!" 이 말은 키르케고르의 각성을 준비시키는 또 하나의 나팔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키르케고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자 그에게 가장 필요한 말이었다. 하만의 사상은 키르케고르 사상의 씨앗이 되었다.


하만이 키르케고르에게 영향을 준 것은 다음과 같다. 이성의 한계를 지적하고 신앙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하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수의 필명을 사용하여 저술하였는데 이는 키르케고르의 익명의 저술, 즉 간접 전달 방법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키르케고르와 달리 하만의 저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익명이다. 둘은 동일하게 소크라테스를 이성주의의 비판자로 내세웠다. 하만은 "실존 체계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며 오로지 신에게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런 사상의 맥락에서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사변철학을 비판하고, "진리는 객관적으로 불확실하며 주체적으로 전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성과의 전쟁: 실존은 체계가 불가능하다


낭만주의와 경건주의의 영향 하에 있는 루터교 신자 하만은 키르케고르에게 영향을 끼친다.  키르케고르는 하만을 자신과 가장 잘 통하는 동시대 사람이라고 여기고 사상적 방황을 돌파하고 기독교적인 회심을 준비하는 계기로 삼는다.


1836년 9월 10일에 키르케고르가 하만을 처음으로 언급하며 기록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하만은 이성을 바울의 율법과 유사한 것으로 설명한다. 율법처럼 이성도 거룩하고, 의롭고, 훌륭하지만, 인간을 의롭게 하거나 인간을 구원할 주체가 못된다고 한다. 바울이 율법 대신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을 강조했듯이, 하만은 이성 대신에 신앙을 진리 추구의 올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하만이 모세의 율법과 이성을 비교한 것이 흥미롭다. 하만은 데이비드 흄(Hume)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세상 지혜의 최후의 열매는 인간의 무지와 나약함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하만은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성은 바울이 말한 율법과 같다. 이성의 명령은 거룩하고, 의롭고, 훌륭하다. 그러나 이성이 우리를 지혜롭게 할 수 있겠는가? 율법이 유대인을 의롭게 할 수 없었던 것처럼, 이성은 인간이 얼마나 비이성적인지를 확증할 뿐이며, 율법을 통하여 죄가 더하듯 이성을 통하여 인간의 오류가 증가할 뿐임을 보여준다. 출처: Ronald Gregor Smith, "Hamann and Kierkega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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