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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Dec 07. 2021

키에르케고어《공포와 전율》저술배경

《공포와 전율》읽기 안내서 3

키르케고르(Soeren Aabye Kierkegaard)는 1813년 5월 5일에 코펜하겐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교회의 영토에서 일하는 봉건 노동자였는데 자기 일이 너무도 힘들고 싫어서 어느날 언덕 꼭대기에 올라가 진중하게 신을 저주했다. 21세에, 키르케고르의 아버지는 봉토(vassalage)에서 풀려나 코펜하겐으로 이사했는데 거기서 도매업으로 부유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신을 저주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의 첫번째, 두번째 부인이 죽었고, 첫번째 부인에게서는 자녀가 없었지만, 두번째 부인에게서 난 7명의 자녀 가운데 5명이 34세 이전에 다 죽고 말았기에 그 죄책감은 더욱 크게 그를 괴롭혔다. 이로 인해서 그는 우울하고 어두운 기질을 가지게 되었고, 아들 쇠얀 키르케고르에게 그런 기질과 함께 엄격한 종교적 양육방식을 물려주었다.


키르케고르는 청소년기에 사교성이 있었으며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840년에 레기나 올센(Regine Olsen)과 약혼했다. 1년 뒤,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에, 그는 갑자기 파혼했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녀의 남편이자 훌륭한 시민으로서의 윤리적 의무감보다는 그보다 더 문학적이고 지성적인 의무감을 더 크게 느꼈던 것 같다. 파혼 후에 그는 엄청난 속도로 가명의 이름으로 저술을 하기 시작했다. 《공포와 전율》은 그의 초기작품 가운데 하나로 1843년에 출판했고, 같은 날 《반복(Repetition)》을 출판했을 정도로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당시 덴마크 교회의 위선에 점차 좌절감을 느꼈고 그는 신앙의 역동을 상실한 교회를 비판하는 책자들을 출판하느라고 상당한 유산을 쏟아부었다. 1855년에 거리에서 쓰러져 11월 11일 폐렴으로 죽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서 덴마크 교회가 그의 장례를 주관했다. 


그가 죽었을 때, 키르케고르는 코펜하겐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고, 그의 작품은 무시를 당했다. 1877년에 키르케고르에 대한 최초의 논문이 나왔었고, 20세기가 되어서야 그의 사상이 각광을 받았다. 수많은 지성적인 운동에 영향을 끼쳤고, 특별히 실존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었다.


키르케고르 당시의 덴마크 철학은 G.W.F.헤겔의 사상에 압도적으로 지배를 받았다. 헤겔은 지난 200년 간 대륙 철학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이며, 《공포와 전율》은 헤겔 사상에 대하여 응답하기 위해 쓰여졌다. 헤겔 철학의 기반은 변증법이다. 변증법은 정(테제)과 반(안티테제)이라는 상반된 개념이 종합을 이루는 과정을 말한다. 종합은 다시 정/반의 쌍을 이루게 된다. 변증 과정을 통하여, 철학은 점차로 진리에 접근하게 된다. 이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진리를 '절대 정신'(the Absolute Mind)이라고 불렀고, 헤겔은 진리에 대한 우리의 탐구를 안내할 수 있는 논리적 체계를 구성했다. 


헤겔 체계의 중요한 측면은 보편적인 것으로서의 윤리적인 것에 대한 정의이다. 헤겔에 따르면, 최고의 목표는 한 개인이 보편적이 것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왠지 불교 색채를 띠는구나.


개인은 자신의 개인적 욕망과 야망을 철폐해야만 하고 마르크스 사상에 영향을 준 말이구나. 만민의 일반 이득이 개인의 동기가 되어야만 한다. 전체주의를 강조하고 개인의 중요성은 없어지는구나. 마치 개인이 전체가운데 하나의 톱니에 불과하게 되겠구나. 보편적인 것의 일부가 되는 것이 절대정신의 전지적 관점을 얻게 되는 유일한 길이다.


헤겔의 체계는 공산주의와 나치즘의 발전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키르케고르는 헤겔의 공산 사회적 윤리관을 반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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