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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Dec 05. 2021

1848년, 가장 창의적이고 혁명적인 해

사랑과 영혼의 철학자 12

1848년, 경제적 파산 그러나 가장 창의적인 해 "the richest and most fruitful year I have experienced as an author"


1848년, 키르케고르는 경제적인 파탄을 경험했다. 그러나 가장 창의적이고 혁명적인 해가 되었다.


1847년 5월 5일, 결코 넘기지 못할 것 같은 34세의 생일이 되었다. 키르케고르는 자신의 삶과 재산을 이때에 맞추어 다 소비하도록 계획을 세웠기 때문에 더 이상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집을 팔기로 결심한다. 1847년 8월 16일 그는 강력한 기분전환책인 베를린으로 짧은 여행을 떠나려던 것을 취소한다.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 때문에 집을 떠나는 것이 곤란해서, 베를린 여행을 취소하기로 한다. 이때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내가 집에 머무른다는 사실에는 매우 깊은 이유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느낀다. 나는 그런 강한 기분 전환책이 없이도 견뎌 낼 수 있도록, 언젠가는 나 자신을 길들이기 시작해야만 한다.... 내적으로 거듭되어야만 한다.... 내 마음속에 어떤 변모(變貌)를 암시하는 것이 꿈틀거리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베를린으로 여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베를린으로 간다는 것은 태아를 유산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임춘갑 역, 『키에르케고르 생애와 사상』262-64쪽. 1847년 8월 16일 일기) Gates, 앞의 책, pp. 119-22, Lowrie, 앞의 책, pp. 203-05를 참고하라.


1848년(35세)은 키르케고르의 지적인 생산성이 절정에 달한 해였다고 말한다. 『죽음의 이르는 병』, 『기독교 훈련』, 『관점』 등을 집필한 해로 가장 창의적인 작가 활동을 해이다. 1848년은 유럽에서 ‘혁명의 해’라고 불린 때이며, 사상적으로는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해이기도 하다. 바로 이 해가 키르케고르 개인에게는 영적인 혁명의 해였다. 1848년은 키르케고르에게 경제적으로는 정부에 투자했던 채권이 평가절하되어 막대한 재산을 손해를 보았으나, 영적으로는 가장 활발한 활동과 결과물을 낸 해였다.


경제적인 불안이 갑자기 나를 엄습하였다. 갑자기 혼란(전쟁과 혁명)이 터졌다. 내일이면 아마도 나는 전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질 것이다. 글자 그대로 한 푼도 없는 인간이 될 것이다. 이런 지경이었다. 이것이 나를 몹시 괴롭혔다. 그러나 그럴수록 내 정신은 한층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나는 이전보다 한층 힘차게 생산하였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한층 죽어가는 사람처럼 생산하였다. 그리스도교의 방향에 있어서 그것은 일찍이 내가 도달한 것 중에서 최고의 것이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1848년 일기



2차 회심. 1848.4.19. 수요일


키르케고르의 두 번째 회심체험은 1848년에 일어났다. 이것을 그는 ‘두 번째 지진체험’이라고 부르는데, 자신이 34세에 죽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1847년 죽음을 경험하지 않는 것은 키르케고르에게 기적과도 같은 충격적인 체험이었다. 키르케고르는 회심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점진적이라고 보고 있다. 중생의 체험과 함께 인격의 발달과 성숙을 중요하게 여겼다. 자기를 부정하고 예수가 가신 좁은 진리의 길을 가는 것은 과정이지 일회적인 결단이나 체험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키르케고르는 종교적인 사상에 너무나도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조국과 독일과의 짧은 전쟁과 절대군주체제에 종지부를 찍은 무혈혁명 따위의 중대한 여러 사건에는 무관심하였다고들 믿고 있다. 그러나 사실 키르케고르는 이미 그 해에 일어난 여러 사건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고, 또 그 당시에 지배적이었던 정치적인 여러 이데올로기를 초월하고 있었던 것이다. 
- 월터 라우리가 평가한 1848년의 키르케고르 - 


“나의 전존재가 변했다. 내 은폐성과 칩거성은 파괴되었다.... 나는 말해야만 한다. 주여, 내게 은총을 베푸소서!”


1848년 4월 19일 수요일, 부활절 전의 고난주간의 일기에 ‘변모’라는 언급이 등장한다. 키르케고르는 지금까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가명을 사용하여 왔는데, 이제는 더 이상 가명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 했다. 또 하나는 우울한 그의 성격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는 ‘경솔한 한량’처럼 보였지만,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열어놓아야겠다는 마음의 결심을 하게 된다. 자신을 투명하게 세상에 보여주고자 하는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걸으라.” 어떤 사람이 진실로 자신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고 믿은 경험을 가진 일이 있거나, 또는 경험을 할 때, 그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 된다. 모든 것이 망각된다. 그러나 그 경우와는 사정이 다르다. 어린애는 사함는 받고 나서도 여전히 어린애 그대로 있다. 아니다, 그는 한없이 성실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제 정신이 되었고, 세상과 자기 자신에게 매달려 있는 자신의 이기성을 모든 직접성과 함께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그는 이제 늙었다. 엄청나게 늙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원히 젊은 것이다. 1848년 4월 24일, 부활절 날 쓴 일기에서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일어나 걸으라."


이러한 ‘변모’의 체험은 1848년 4월 24일, 부활절 날 쓴 일기에서 죄 사함을 받고 병 고침을 받은 중풍병자에 대한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죄가 사함을 받았다는 깊은 확신을 얻게 된다. 이러한 체험의 결과, 그의 작품활동에 변화가 생겼다. 가명의 저술에서 이제는 자신을 편집인 또는 저자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1848년 4월에서 11월 사이에 쓴 『관점』이라는 저서에서 그는 저술가로서의 이제는 자신이 드러내 놓고 종교적 실존에 대하여 말하리라는 결심을 보여주고 있고, 지금까지 자신의 저술활동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저술가로서의 나는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이기를 원하고 있는가. (...) 지금이야말로 그런 절호의 시기다.... 침묵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 (...) 저술가로서의 나의 저술활동의 전체는 그리스도교와 연관되어 있고,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기 위하여 나는 우리가 그리스교계라고 부르고 있는 엄청난 착각을 공격하였고, 그런 풍토에서 그럭저럭 그리스도인 된다는 착각에 대하여도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공격한다. 1848년 4월에서 11월 사이에 쓴 『관점』이라는 저서에서


키르케고르의 ‘제2의 회심’ 이후 키르케고르의 작가로서의 생산성은 절정에 달한다. 1848년에 《그리스도교 훈련》를 썼다. 그는 일기에 "《그리스도교 훈련》은 내가 쓴 것 중에서 가장 진실하고 가장 완벽한 것이다." 라고 썼다. 그런데 2년 후에 쓴 《자기 성찰을 위하여》와 《너 자신을 판단하라》는 차례로 《그리스도교 훈련》를 능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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