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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Dec 04. 2021

1846년, 코르사르 사건

사랑과 영혼의 철학자 11

최후의 저술, 1846년 《후서》


《후서》(CUP, Concluding Unsicientific Postscript to Philosophical Fragments, 《철학의 부스러기의 비학문적 결론적 후서》)를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마무리하고 시골 교회 목사가 되려고 했다.  《부스러기》(<철학적 단편>으로도 번역됨)와 《후서》의 가명 저자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는 25세의 논쟁적이며 철학적인 청년이다. 바른 믿음을 행함이 따른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하네스는 사도 요한을 말하는데 '말씀'을 상징하고, 클리마쿠스는 '사닥다리', 올라간다는 이미지로 '실천'을 강조한다. 이 청년은 기독교 진리를 알고 있지만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드러내기를 수줍어하는 인물로 보면 된다.


키르케고르의 사상이 들어있는 두 권의 책이 있다. 그의 인식론과 형이상학이 들어있는 가장 중요한 책이 요하네스 클리마쿠스가 저술한 두 권 《철학의 부스러기》와 《후서》이다. 《후서》는 기존의 형이상학을 비판하면서 실존주의의 길을 연 키르케고르의 사상의 요체가 들어 있는 매우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의 주제는 진리의 주체성이며, 내면적 종교성과 계시적 종교성(참된 기독교)을 다루고 있다.


키르케고르는 사실상 이 책을 마지막으로 그의 그리스도교 사상의 전개를 매듭짓고 시골에 가서 목회를 하려고 하였다. '결론적'이라는 제목이 그것을 암시한다. '비학문적'이라는 제목은 헤겔의 체계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에 반대하여 실존적이고 개인적, 인격적 관점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후서'라는 말은 일종의 헤겔의 사변철학과 기독교의 사변적 교리에 대한 풍자를 내포한다.


편지를 쓰는데 '추신'이나 '부록'이 그보다 분량이 더 많은 것을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본서에 비하여 《후서》는 5배 내지 6배 분량이 많다. 한 마디로, 논리적인 체계는 세울 수 있어도 실존의 체계는 세울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철학의 부스러기》와 《후서》의 차이를 간단하게 설명하자. 전자는 인식론적 반성이며, 후자는 실존적인 반성을 한 책이다.


《후서》에서 클리마쿠스가 일반적 주체성'(소크라테스적인 것)에 대하여 '기독교의 주체성'보다 5배 더 길게 다루고 있다. 또한 주체성에 할애한 분량은 객관성에 할애하는 분량보다 15배 더 많다. 또한 내면적 종교성을 계시적 종교성(초월성의 종교)보다 거의 7배 더 길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주제는 기독교의 진리가 아니라 기독교와 개인에 관한 것이다. 기독교 진리는 객관성에 관한 문제이지만, 기독교와 개인은 주체적인 문제와 관계된다.



1846년, 코르사르 사건


풍자 신문 코르사르의 사건을 통하여 그의 인생은 변화되었다 전환점을 맞았다. 대중의 허구성을 깨닫게 되었고 종교적 저술을 시작하게 되었다. 1846년, 그의 나이 33세이다. 자신이 죽을 운명이었을 거라고 생각한 그 해이다. 자녀 중에서 33세 이전에 형 빼고 다 죽었기 때문에, 자신도 이때 죽을 것이라는 죽음에 대한 의식을 안고 살았다. 그래서, 자신의 철학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후서》를 2월에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라는 익명으로 출판했다. 그는 이제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작가로서의 저술활동을 중단하고 한적한 시골에 가서 시골 사람들을 상대로 조용히 목회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저술가로서의 두 번째 시기를 시작하게 된 뜻밖의 일이 터졌다. 코르사르 사건이다.


1846년, 키르케고르 자신의 문학적 소명이 "종결되었다"라고 선언하고 작은 시골마을에 들어가 목회하려고 결심했다. 그러나 덴마크의 풍자적 주관지 '코르사르(Corsair, '해적선'이란 뜻)'와 싸움이 벌어져서 방향이 틀어지게 되었다. 누가 먼저 인신공격을 하였고 도발했는지는 좀 더 연구해보겠습니다. 키르케고르에게 인신공격을 했다고 하는 책도 있고, 키르케고르가 도발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이 잡지는 키르케고르를 무자비하게 풍자하였다. 키르케고르는 절름발이에 꼽추인 기묘한 사람으로 묘사하는 일련의 풍자화를 계제하였다. 1년 간 지속된 이 싸움을 통하여 키르케고르는 목사의 길을 가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이 거부권을 행사했다고 받아들이고 두 번째 시리즈를 이후 7년간 발표한다. 이 작품들은 거의 본명으로 저술하기 시작했으며, 종교적인 성격을 띤다. 종교적인 기준은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따르는 제자가 되는 것이다.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의 저서 《그리스도를 본받아》가 클리마쿠스의 애장서였다고 한다.


코르사르는 매주 발행되는 악덕신문으로 소문난 풍자신문이다. 유태계 시인 골드슈미트가 발행인이다. 1년간의 싸움을 통하여 신문이나 세상, 군중의 본질, 언론의 본질 등 현대의 문제점을 파악하게 된다. 1846년《현대의 비판》에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이때부터 두 번째 저술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코르사르 사건 이후의 저술의 변화


새가 죽어갈 때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고 하던가. 키르케고르는 1년간 풍자신문의 조롱과 비웃음을 받으며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을 때, 악기의 새로운 현을 하나 추가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저술가로서 나는 내 악기에 새로운 줄 하나를 얻었다. 나는, 그런 일이 없었더라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음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1846년 일기 중에서


키르케고르는 언론과의 전쟁을 통해서, 꿈에도 낼 수 없었던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이제 그는 종교적인 저술가가 되었다. 간접전달에서 직접전달을 하게 되었다. 기독교를 직접 전달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키르케고르의 간접전달을 교육학이나 설교학에서 언급하는데, 후기에 키르케고르의 직접전달에 대해서도 잘 알고 활용해야겠다. 이렇게 그가 글쓰기의 스타일과 방법이 달라진 것을 "옷을 바꿔 입어야만 했다."라고 말한다.



코르사르 사건 이후 '종교적 저술들'


1847년, 《마음의 청결》,새와 백합에게 배우라》,《고난의 복음》 강화집

1847년, 《사랑의 역사》

1848년, 《이방인의 염려》,《고난의 기쁨》,《기독교의 공격》, 《성찬의 위로》, 《스키피오 장군 배역의 피스터》, 《그 위기, 그리고 여배우의 생애의 하나의 위기》

1949년, 《들의 백합화, 공중의 새》 강화집

1849년, 《죽음에 이르는 병》

1850년, 《기독교 훈련》

1851년, 《작가로서의 나의 저술에 대하여》

1851년, 《자기시험을 위하여》 강화집

1851-52년, 《스스로 판단하라!》 강화집


코르사르 신문사에서 키르케고르를 풍자하여 그린 그림. 코르사르 신문사는 1846년 한 해 동안 키르케고르를 위협하고 괴롭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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