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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Dec 04. 2021

키에르케고어, 저술의 4가지 축

사랑과 영혼의 철학자 10


키르케고르의 저술활동의 네 가지 축이 있다. 지금까지 첫 번째, 두 번째 사건을 다루었다. 앞으로 세 번째, 네 번째를 이야기할 것이다.



첫 번째 축, 1835-1838년 사이의 아버지와의 관계이다.


1835년 '대지진 체험'을 하다. 아버지의 두 가지 과오를 막내아들 쇠렌 키르케고르에게 아버지가 고백한 것이다. 집안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이 저주의 이유를 아들에게 고해성사하듯이 이야기했다. 이 때문에 22세의 청년 키르케고르는 방황을 하기 시작한다. 아버지와 결별하게 된다. 이후 3년간 방황의 시기를 거치다가, 1838년 아버지가 아들에게 무릎 꿇고 사과를 한다. 이를 '영웅적인 고백'이라고 부른다. 이로 인해 키르케고르는 아버지와 화해했을 뿐 아니라, 회심의 체험을 하게 된다.



두 번째 축, 1841년에 있었던 연인 레기나 올센과의 파혼이다.


1840년 9월 10일, 레기나와 약혼하였다. 그러다가 1841년 10월 11일, 연인 레기나와 파혼한다. 왜 파혼하였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그 대략의 이유는 다른 글에서 소개하기로 하겠다.  


'레기나와의 관계가 끊어졌을 때의 나는 거칠고 방종한 생활에 떨어지느냐, 그렇지 않으면 절대적 종교성으로 향하느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파혼할 때 키르케고르는 종교적 저술가가 되어 기독교의 복음의 본질을 바로 드러내는 것을 사명으로 삼게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결심한다.


"그 순간부터 나는 내 생애를 하나의 이데아를 봉사하는데 내 보잘것없는 재능은 마지막 방울까지 다 사용하리라."


세 번째 축, 1846년에 일어난 코르사르 사건이다.


1846년, 그의 나이 33세이다. 자신이 죽을 운명이었을 거라고 생각한 그 해이다. 자녀 중에서 33세 이전에 형 빼고 다 죽었기 때문에, 자신도 이때 죽을 것이라는 죽음에 대한 의식을 안고 살았다. 그래서, 자신의 철학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후서》를 2월에 요하네스 클리마쿠스라는 익명으로 출판했다. 그는 이제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작가로서의 저술활동을 중단하고 한적한 시골에 가서 시골 사람들을 상대로 조용히 목회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저술가로서의 두 번째 시기를 시작하게 된 뜻밖의 일이 터졌다. 코르사르(Corsiar, 해적선이란 뜻) 사건이다. 코르사르는 매주 발행되는 악덕신문으로 소문난 풍자신문이다. 유태계 시인 골드슈미트가 발행인이다. 이에 대하여는 바로 다음의 글 11회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1년간의 싸움을 통하여 신문이나 세상, 군중의 본질, 언론의 본질 등 현대의 문제점을 파악하게 된다. 1846년《현대의 비판》에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이때부터 두 번째 저술 시기, 즉 가명이 아닌 본명으로 직접 종교적인 글쓰기를 하는 시기로 접어들게 된다. 이것을 '강화집(Upbuilding Discourses)'이라고 부르는데, '덕을 세우는', '건덕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글들이다. 고인이 되신 고려대 철학과 표재명 교수님께서 키에르케고어의 강화집을 번역하셨는데, 그 뒤를 이어서 강화집을 번역하는데 헌신하신 분이 이창우 선생님이시다. 이창우 선생님은 《고난의 복음》 《이방인의 염려》 《고난의 기쁨》 《기독교의 공격》 《성찬의 위로》 《자기시험을 위하여》 《스스로 판단하라》 등과 같은 키에르케고어의 강화집을 번역하는데 헌신하여 왔고 앞으로 계속해서 강화집을 번역할 예정이다. 키에르케고어의 사상의 핵심은 강화집에 있다고 마틴 하이데거도 밝힌 바와 같이, 독자들이 그의 강화집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네 번째 축, 1854년에 죽은 지도자 뮌스터의 죽음을 미화한 것에 반박한 사건이다.


코르사르 사건 이후로, 키르케고르 사상에서 '순교'가 중요한 주제였다. 그런데 과연 당시 그리스도교는 순교자의 길을 걷고 있는가 질문하며, 교회에 대하여 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덴마크 교회의 수장인 뮌스터 감독이 죽음을 맞이했다. 뮌스터는 키르케고르가 어려서부터 존경했던 분이다. 그러나 이제 교회 지도자 뭔스터에 대하여도 비판적인 마음이 들었다.


1854년 뮌스터가 죽은 지 며칠 후 신학교수인 마르텐센이 추도 설교를 했다. 이 설교에서 뮌스터 감독을 진리의 증인, 사도시대로부터 우리의 시대까지 계속되고 있는 거룩한 연결고리라고 설교했다. 이 설교를 듣고 집에 돌아온 키르케고르는 격렬한 반박문을 썼다. 9개월이 지난 후 마르텐센이 후임 감독으로 취임할 것이 결정되자, 이 반박문을 1854년 12월 18일 <조국>에 발표했다. 글의 제목은 <감독 뮌스터는 과연 진리의 증인이었나?>이다. 이 글로 시작하여 당대 교회의 문제들을 비판하기 시작하는 글을 죽기 전까지 왕성하게 발표했다.


Backhouse의 글에 따르면 키르케고르는 35권의 저술과 25권의 일기를 썼다. (※ 표재명에 따르면, 20권의 책과 25권의 일기, 84편의 강화라고 하였고 월터 라우리는 86편의 강화라고 하였다.)


1. 키르케고르의 사상과 저술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1841년, 레기나 올센과의 파혼 이후 1845년까지 왕성한 저술을 했다. 주로 심미적이고 철학적인 저술이었다. 3. 1846년, 코르사르 사건 이후, 기독교의 본질을 드러내는 두 번째 저술의 시기를 맞이했다. 4. 1854년, 뮌스터 감독의 죽음을 '진리의 증인'이라고 미화했던 마르텐센의 설교에 반박하여, 당시의 교회가 성경의 교회와 거리가 멀다는 것을 비판하며 그가 1855년 죽기 전까지 왕성한 저술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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