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장 13절에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따라서 '공포와 전율'보다 '두려움과 떨림'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믿음'을 주제로 한다. 믿음의 기사(the knight of faith)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다룬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독자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하는 이야기를 통하여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조명하고 있다.
키르케고르가 지은《공포와 전율》은 《반복》과 쌍둥이 작품이다. 1843년 같은 해에 출판되었고, 키르케고르가 레기나와 파혼(1841년 10월 11일)한 이후 '실연'을 모티브로 하여 쓴 책이다. 키르케고르는 파혼 이후에 베를린으로 가서 셸링의 강의를 듣는다. 독일에서 《반복》을 완성했고, 코펜하겐에 돌아와서 《공포와 전율》을 완성했다. 《반복》은 키르케고르의 사랑의 체험의 직접적인 소산이고, 《공포와 전율》은 그것을 청산하고 승화하기 위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불합리와 신앙
신앙은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이 있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불합리하다. 아브라함이 그 명령에 순종한다면, 그것은 살인인가 희생인가? 그리스 신화에서 아가멤논은 여신의 노여움을 달래고 항해하는 바다를 잠잠하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딸 이피게니아(Iphigenia)를 제물로 바친다. 이것은 비극적이지만 당시에 영웅으로 칭송받는 일이었다. 성경에 나오는 입다 역시 승리의 제물로 신에게 딸을 바치겠다고 공언하였다. 비록 비극으로 끝났지만, 이는 당시 사회에서 영웅으로 정당화를 받는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는 일은, 정당성을 얻지 못한다. 아무도 이해할 수도 없고, 그를 영웅이라고 인정하는 사람도 없다. 이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의 문제이다.《공포와 전율》은 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독자 이삭을 바치려 한 사건을 다루면서 신앙의 역동적인 면을 부각시킨다.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이다.
하나님께서 네 아들 이삭을 통하여 복을 주시겠다, 번성하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비록 자신이 이삭을 바친다 해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었다. 아브라함의 인생에서 마지막 시험, 그것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일이었다.
신앙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사건은, 신앙이 단지 어떤 지식을 축적하거나, 어떤 교리를 인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음을 보여준다. 신앙은 행동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체념(resigning)과 되찾음(receiving)
요하네스 데 실렌티오의 《공포와 전율》의 주제는 '믿음'이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다룬다. 그런데 어떤 설교나 감화를 주려는 신앙적 글은 아니다. 하나의 철학적 사유이다. 기독교를 변증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다. '체념과 되찾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포기했으나 돌려받는 것, 하나님께 드렸으나 새로운 의미에서 자기의 소유로 돌려받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
《공포와 전율》과 《반복》은 쌍둥이 작품이다. 이 책은 《반복》과 쌍둥이 작품이다. 1843년 같은 해, 6월 같은 달 출간되었다. 키르케고르가 레기나와 헤어진 후의 연인을 상실한 것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키르케고르는 비록 레기나를 사랑해서 떠났지만, 영적인 차원에서 그를 새롭게 돌려받는 것을 꿈꾸었다.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이 없다고 믿고, 반드시 돌려받으리라고 믿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