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논문 심사 때 5명의 심사위원이 있었다. 세 번의 중간발표를 해야 하는데, 매번이 고비였다. 자체 학과 내에서 발표할 때 강*모 교수님은 내 페이퍼를 학생들 앞에서 집어던졌다. 그래도 우리 세미나 그룹은 다 같은 처지여서 그렇게 부끄럽지는 않았다. '페이퍼를 집어던짐을 당한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가. 그렇게 부족한 자임을 알고 있다.
박사학위 심사 때도, 초안이 너무 부실해서 '가망 없다', '받아줄 수 없다'라고 심사 위원장이 말했다. 그때 나의 지도교수님은 이렇게 나를 변호해주셨다.
"이 학생은 잠재력이 많은 학생입니다. 분명히 결과물을 낼 수 있는 학생이기에 시간을 더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 결과 이후에 미친 듯이 몰입하여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했다. 페이퍼를 집어던졌던 교수님도 내 논문을 들고 세미나에 들어가서 '너희들도 이렇게 논문을 써내라'라고 칭찬했다고 전해 들었다.
글쓰기를 배우지 못한 고통
나는 글쓰기를 배우지 못한 고통을 체험했다. 일기는 늘 썼지만 남에게 보이는 글을 쓰지 못했다. 미국 유학시절에 <욥기>에 대한 기말논문을 영어로 쓰는데, 미치고 팔딱 뛰어도 소용이 없었다. 우울과 불면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글쓰기를 못하는 고통으로 욥처럼 힘들었다. 결국 화장실에 가서 볼 일을 봤지만 뒤처리를 못한 듯한 소논문을 영어로 쓰고 스스로 대견해하며 좋은 학점을 기대했는데, 실망이었다. A를 받지 못했다. 그저 영어로 소논문을 썼다는 사실에 들떴을 뿐, 평가는 정확하고 냉정했다.
우리나라 교육은 글쓰기 교육을 하지 않는다. 미국의 교육은 서론, 3개의 대지와 예시와 증거, 결론으로 글쓰기 교육이 공식처럼 되어 있었다. 초등학교 5~6학년 때 이미 그 교육을 한다는 것을 이후에 알았다.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어서 고통받는 게 당연했다. 지금은 블로그, 카카오 브런치 등 글쓰기를 많이 한다. 독서는 하지 않지만, 텍스트 소비율은 역사상 최고의 시대를 살아간다. 책은 읽지 않지만 글쓰기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실히 필요하다. 다윗이 물맷돌로 골리앗의 이마를 명중시켜서 물리쳤듯이, 글쓰기를 다윗의 물맷돌 던지는 솜씨 만큼이나 익숙하게 연마할 필요가 있다. 노년에도 글쓰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글 못쓰는 병 치료제, 막쓰기
연구를 많이 한다고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보가 많으면 정보에 파묻혀 글이 안 나온다. 박사논문을 쓸 때, 전날 연구한 것을 아침의 첫 시간에 글로 막 써 내려갔다. 이게 막쓰기(messy writing)이다. 그렇게 막쓴 글들이 쌓여서 그중에서 글을 추려서 논문을 만들어 갔다. 막쓰기를 매일 해서 글이 쌓이니까 데드라인이 다가와도 조급함이나 초조함이 없어졌다. 왜? 글 써놓은 게 있으니까.
팬데믹 시기에 내가 한 일들
코로나 시기에 나는 호메로스를 읽었고, 서양철학사과 현대 유럽 철학(스토리라인 김지숙 선생님인도), 실존철학자들(최환열 박사님 강좌)을 집중 공부했다. 줌(Zoom)모임을 가졌고, 키르케고르 강좌(이창우 선생님 강좌)에 참여했다. 공부한 것을 틈틈이 글로 써두었다. 키르케고르 강화집 번역을 틈틈이 해오고 있었다.
갑자기 8월에 5권의 책을 출판한다니 놀랍다는 반응이 있는데,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저 매일 하던 일이 쌓이니까 결과물이 생겨났다. 책을 쓰려고 한 적은 없었고, 그저 매일 주제를 정하거나, 읽고 정리할 분량을 정해서, 글을 썼다.
이렇게 글쓰기를 하고 책쓰기를 하게 된 것은 서양철학과 문학에 대한 나의 무지함에 대한 자각 때문이고, 글을 쓸 수 없어서 견딜 수 없이 갑갑하고 분통이 터졌었던 유학시절과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걸린 병 때문이다. 그때의 고통으로 인하여 글을 쓰게 되고 그 결과로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놀랍지 않은 결과물
자랑할 건 없다. 글쓰기를 할 줄 몰라서 글쓰기를 하게 되었다. 서양철학과 인문학을 몰라서 공부하게 되었다. 무지함을 통감한다면, 독서하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면 좋다. 오늘 아침 박사학위 지도교수님이 나에게 기회를 준 것에 감사하여
안부인사를 전했다.
교수님, 아침에 주일예배를준비하다가 인사를 드립니다. 대학원에서 이끌어주시고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후견인이 되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올 8월에 5권의 책을 출판하게 되었습니다. 키르케고르의 강화집은 종이책으로, 나머지는 전자책으로 출판했습니다.
자격 없는 자에게 끊임없이 기회를 주신 교수님의 보호와 안내에 감사 드립니다. '지금은 다 드러나지 않지만 가능성이 있는 제자'라고 말씀해주시고 박사학위 심사위원들을 설득하셨던 그 말씀이 떠오릅니다. 포기하지 않으니 이렇게 결과물이 나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