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강독 메모. 코페르니쿠스, 튀코 브라헤, 케플러
매주 1회 9시부터 10시 30분까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강독을 한다. 때로는 월요일날 보충을 한다. 천문학자 최승언 서울대 명예교수님과 함께 하는 <코스모스> 강독의 독특한 점은 읽는 순서에 있다. 역사의 시간 순서에 맞게 7장-3장-1장의 순서로 시작한다. 7장 '밤하늘의 등뼈'에서 고대의 소크라테스 이전의 이오니아의 자연철학자들을 다룬다. 그들은 최초의 과학자들이었다. 이들을 이오니아 학파라고도 하고 밀레토스 학파라고도 하는데, 이오니아 지방의 밀레토스 도시를 말한다. 피타고라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최초로 주장했으며,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는 최초로 지동설을 믿은 사람이었으며 별들이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 행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최승언 교수님과 함께 하는 강독은 말 그대로, 교수님이 낭랑한 목소리로 그날의 본문을 낭독하면서 설명도하시고 진행한다. 처음에는 '어느 새 이 두꺼운 책을 다 읽을까?' 생각했는데, 빨리 읽는 것보다, 한 주 한 주 우주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지내는 것이 좋아졌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읽는 순서를 7장 '밤하늘의 등뼈'와 3장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를 읽은 후 1장부터 순서대로 읽어보는 것이 천문학의 역사 순서대로 볼 수 있어서 유익하다.
<코스모스> 7장에 이어서 3장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를 읽었다. 3장에서는 16세기의 대표적인 천문학자 3인을 다룬다. 코페르니쿠스, 튀코 브라헤, 요하네스 케플러이다. 지동설을 주장한 천문학자들의 작업은 천동설을 주장했던 로마의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AD 90년경~168년경)의 작업을 기초로 한다. 프롤레마이오스의 지동설은 1500년간 서양세계를 지배왔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의 가톨릭 성직자였다. 1510년에 최초로 지동설을 주장했으며, 그가 죽은 해인 1543년에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지동성을 자세히 주장했다. 그는 폴란드 태생으로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에서 공부했다. 코페르니쿠스는 당시 토성만 발견되어 있었는데 내행성과 외행성을 알고 있었다. 요하네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한계를 수정하고 보완했는데, 코페르니쿠스의 한계는 행성이 원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케플러의 연구에 따르면 행성의 운동은 원이 아니라 타원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근거하여 논의하는 스콜라 철학의 학문적 전통을 따르지 않고 천체를 관측하고 궤도를 계산하는 실지천문가였다. '코페르니쿠스의 혁명', 또는 '코페르니쿠스의 전환'라는 말이 있듯이 그는 과학 혁명의 길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인간이 가장 위대한 존재라는 전통적인 사고의 전환을 가져왔다.
요하네스 케플러도 독일사람이다. 시골 마을 마울브론의 개신교 신학교에 들어가 성직자가 되는 교육을 받았고 튀빙겐에서 공부했다. 케플러의 신은 기하학의 신이며, 코스모스를 창조한 권능의 신이었다.
"기하학은 천지 창조 이전부터 있었다. 기하학은 신의 뜻과 함께 영원히 공존한다. 기하학은 천지 창조의 본보기였다. 기하학은 신 그 자체이다."
케플러는 수학이 주는 기쁨을 즐기며 세속에서 벗어난 생활을 하면서도, 세상의 불완전함을 달래주는 미신적이고 신비적인 요소를 지신 점성술을 의지하기도 했다. 점성술은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이 방법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돈도 벌었던 것 같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이 케플러라는 단 한 명의 독자가 나타나기까지 1,000년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케플러는 태양계 구조의 근본을 물으면서 수많은 계산을 마다하지 않았다. 대단한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런 연구를 통하여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가 찾아낸 행성 간 거리가 잘못된 값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행성의 겉보기 운동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대 제일의 관측가인 튀코 브라헤의 관측 차료가 필요했다.
덴마크 사람으로 오늘날 체코의 프라하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황실 수학자였던 튀코 브라헤는 수학적 명성이 커진 케플러를 초청할 것을 루돌프 2세에게 부탁해서 성사되었다. 최고 계산가 요하네스 케플러와 최고의 관측 전문가 튀코 브라헤, 그리고 재정을 후원한 루돌프 2세 황제, 이 세 사람의 만남을 천문학자 최승언 교수는 '삼위일체적 만남'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요하네스 케플러는 튀코 브라헤의 초대를 받아 망설였지만, 30년 전쟁의 전조가 되는 여러 개인적인 사건들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에 튀코 브라헤가 있는 곳이 유일한 피난처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케플러는 개신교도로 가톨릭에 의해서 경제적, 정치적으로 밀려났으며, 케플러가 다닌 개신교 학교는 문을 닫았고, 이단으로 간주되어 기도, 서적, 찬송가가 모두 금지를 당했다. 케플러는 벌금 대신에 추방을 선택해서 아내와 의붓딸과 함께 튀코 브라헤가 있는 프라하로 떠났다. 떠나면서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겼다.
케플러는 수학에 능했고, 튀코 브라헤는 관측에 일인자였다. 케플러는 어린 시절 천연두에 걸려 시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천문 관측을 하지 못하고, 천문 관측 자료를 가지고 수학적인 계산을 하는데 집중했다.
튀코 브라헤는 천동설과 지동설을 섞어서 사용한 혼합모델을 가지고 있었다. 튀코 브라헤와 케플러는 25세 차이가 나는데도 서로 많이 다투기도 했다고 기록에 나온다. 케플러는 튀코 브라헤의 관측 자료를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툭툭 던져주는 자투리 자료만을 받아왔을 뿐이다.
케플러를 체코 프라하로 불러서 연구원으로 채용했다. 튀코 브라헤는 천동설을 입증해달라고 요청하면서 자신이 관측한 모든 천문 자료를 케플러에게 넘겨주었다. 그가 죽기 2주 전? 2달 전이다.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다가 계산에 능한 케플러에게 전달해주었다. 두 사람이 만나고 튀고 브라헤는 18개월밖에 더 살지 못했다. 특히 화성의 역행운동을 관측했었다. 갈릴레오, 튀코 브라헤, 코페르니쿠스는 모두 행성이 원형으로 움직인다고 믿었다. 그러나 케플러는 3년에 걸친 긴 분석 끝에 '화성이 태양 주위를 공전할 때 원 궤도가 아니라 타원 궤도를 따라 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가 발견한 법칙은 다음과 같다.
케플러의 천문학에 기초하여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만들 수 있었다. 케플러는 인내심의 대가였다. 지루하고 부단한 관측과 수학문제 풀이를 통하여 천문학을 이루어낸 것이다. 현대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가 말했듯이, 카리스마는 지루하고 일상적인 것을 반복하는 데서 생겨났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실례이다.
"난 50년 동안 기다렸지만 자연이라는 책은 나를 위해 1천년을 기다렸다." 요하네스 케플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