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희랍어 시간>
언어에는 치유력이 있다. 침묵의 힘과 언어의 힘을 보여준 나의 은사님은 독일어와 영어 원서를 꾸준히 독서하셨다. "언어에는 치유하는 힘이 있다"고 하셨다. 천천히 말씀하셔서 어눌하신 듯하지만, 침묵과 독서와 묵상에서 나온 힘이 있는 분이셨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흔히 읽히는 줄거리 중심, 인물 중심, 사건 중심이 아니다. 극도로 내면적인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인 희랍어 강사와 말을 잃어가는 여자가 등장한다. 마치 바다에서 던져져서 올라탈 무언가를 찾듯, 소설을 읽으며 소설의 줄거리와 등장인물과 사건을 찾아 헤매느라 무수한 시적인 언어들을 지나쳤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에 도전하고 싶었을 때와 같은 도전의식이 일어났다. 다행히 분량은 짧다.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거론되었던 분들과 한강 수상자의 차이는 데보라 스미스와 같은 번역자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아니었다. 한강의 글은 시적이고, 상상적이며, 내면적이기에 더 세계적일 수 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희랍어 시간>의 반가운 스토리텔링을 17장에서 발견한다. 시력을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와 말을 잃어가는 희랍어 수강생이 어떻게 서로 접속이 된 일련의 일화에서 둘의 만남이 이어진다. 그러나, 시력을 잃어가고, 말을 하지 못하는 두 사람의 사랑(?)은 이제까지 접했던 그 어떤 사랑과도 다르다. 그들의 대화를 듣거나 특정한 장면 묘사를 보려고 할 것이 아니라, 오감을 기울여서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
<희랍어 시간>에서 남자는 1인칭으로 서술하고, 여자는 3인칭으로 서술된다. 여성을 3인칭으로 서술하는 것은 그녀가 말을 잃어가는, 말을 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지막에는 <희랍어 시간>에서 만난 남자와의 만남과 사랑으로 인하여 말을 잃은 여자는 마지막에 딱 한 번 말을 할 때, 1인칭을 사용한다. 말을 못 하는 것이 치유된 것을 암시한다. 그가 한 한 마디는 '숲'이다.
말할 수 있었을 때, 이따금 그녀는 말하는 대신 물끄러미 상대를 바라보았다. 말하려는 내용을 시선으로 완전하게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처럼. 말 대신에 눈으로 인사하고, 말 대신에 눈으로 감사를 표하고, 말 대신 눈으로 미안해했다. 시선만큼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접촉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녀는 느꼈다. 접촉하지 않으면서 접촉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에 비하면 언어는 수십 배 육체적인 접촉이었다. 폐와 목구멍과 혀와 입술을 움직여, 공기를 흔들어 상대에게 날아간다. 혀가 마르고 침이 튀고 입술이 갈라진다. 그 육체적인 과정을 견디기 어렵다고 느낄 때 그녀는 오히려 말이 많아졌다. (…)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수록 점점 사변적으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런 순간들이 반복되는 시기에는, 혼자 있는 시간에도 글을 쓰는 데 집중할 수 없었다.
한강 <희랍어 시간> 7장 '눈'에서 발췌
희랍어는 너무 함축적이어서 어순을 마음대로 쓴다. 한 단어에 문법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단어의 위치가 자유롭다. 라틴어를 공부하는 서양인도 희랍어 시간에는 항복한다.
왜 희랍어 공부인가? 죽은 언어가 죽어가는 주인공의 현실과 같아서, 그 죽은 언어를 살려보려는 노력이 소멸하는 자신을 살리려는 내면의 싸움이 아닐까.
그렇다. 희랍어는 동사에 이미 주어를 포함하기에 문장에서 놓이는 위치가 자유롭다. 작가는 희랍어의 독특한 특징으로 중간태를 설명한다. 희랍어 강사는 월요일과 목요일에 희랍어 초급반을 가르치고, 금요일에는 희랍어 중급반으로 플라톤 원전 <국가>를 강독한다. 시력을 잃어가는 강사와 말을 잃어가는 여자 수강생은 깊은 바다처럼 고요하지만, 내면은 닫혀 가는 현실 속에서 싸우고 있다. 내면은 살기 위해서 소멸에 저항하고 있다.
시력을 잃어가는 강사는 유전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것을 학생들에게 표현하지 않으려고 강의할 내용을 미리 철저하게 준비한다. 사람들은 여자 수강생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두 사람은 세계를 잃어가고 있다.
작가 한강은 이런 설정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바람이 분다, 가라>를 쓰는 동안 슬럼프가 있었다. 글을 쓰기 어려웠고, 말에 대하여 예민했다. '말을 잃어가는 사람과 빛을 잃어가는 사람, 두 사람의 이야기를 써보자. 어떻게 서로 인식하고 어떻게 서로 다가갈까.' 이런 고민에서 <희랍어 시간>이 탄생했다.
<희랍어 시간>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가 희랍어를 통해서 그 정적과 어둠 속에서 자신들의 빛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
가냘픈 희망이 어두운 곳에서 솟아난다는 작가의 메시지를 암시하는 문장이다.
희랍어 강사는 독일로 이민 가서 살았다.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는데 헤어졌다. 여동생에게 편지를 쓰는 내용이 <희랍어 시간>에 등장한다. 그는 비록 한국에 있지만 자신이 설자리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그가 희랍어 강사가 된 것은 독일에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희랍어를 잘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희랍어를 잘하는 동양애'로 알려졌다.
희랍어를 배우는 여자는 출판사와 편집대행사에서 일했고, 대학과 예술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강의해왔다. 문학잡지의 창간 멤버로 칼럼을 써오기도 했다. 그녀가 말을 잃게 된 것은 반년 전에 어머니를 여의고, 수년 전에 이혼할 때 소송 끝에 아홉 살 난 아들의 양육권을 잃었다. 말을 잃은 것은 그녀가 잃어버린 세계로 인하여 삶에 소멸되어가는 결과였다. <채식주의자>에서 주인공 영혜는 육식을 중단했지만, <희랍어 시간>에서 이름 모를 여자 주인공은 말하기를 멈추었다. <희랍어 시간>은 <채식주의자>보다 플롯이 희미하고, 더욱 시적이며 내면적이다. 말을 잃은 여자 주인공이 말을 하지 않으니, 독자로서 더욱 답답하다. 시력을 잃어가고, 말을 잃어가서 그런지 읽어가는 나도 답답해진다. 앞이 보이지 않고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희랍어 시간> 안에서 이 소설의 속살을 찾아내려고 숨바꼭질하는 나를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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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를 책 제목으로 내건 순간, 이런 제목을 우리나라 소설에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여자 주인공은 고등학교 때인가 실어증 증상이 있었는데 불어를 공부하면서 단어를 말하게 된 치유 경험이 있었다. 비블리오떼크. 불어 단어를 듣는 순간 말을 되찾았던 경험이 있어서, 말을 되찾고자 희랍어 초급반을 수강하게 된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희랍어, 둘 다 반가운 주제이다. 1장에서 '보르헤스'를 언급하는 순간, 이 책을 무조건 인정하고 신뢰했다. 보르헤스는 서구 지성계의 거목이다. 보르헤스를 소설 첫머리에 써서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일까. 1장에서 제네바에 묻힌 보르헤스의 묘비에 새겨진 짧은 묘비명이 '서슬 퍼런 상징'이다.
서슬퍼런 상징(a blue steel symbol)
보르헤스의 묘비명. 실명한 자신과 세상의 단절을 상징한다.
고대 노르웨이 서사시에서 따온 글귀인데, 남자와 여자가 파란 강철 칼날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누워있는 마지막 밤을 보내는 장면을 묘사한다. 시력을 읽어가는 남자가 1인칭으로 표현하는 이 묘사는 보르헤스가 늦은 나에게 겪은 실명을 의미하고 세상에는 '친밀한 단절'로 가득하다는 의미이다.
한 연구자는 '서슬 퍼런 상징'이 보르헤스의 문학으로 들어가는 의미심장한 열쇠라고 -기존의 문학적 리얼리티와 보르헤스 식 글쓰기 사이에 놓은 칼-믿었던 그와는 달리, 나는 그것을 지극히 조용하고 사적인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그 서슬 퍼런' 칼날이,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失明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
1장에서 시력을 읽어가는 희랍어 강사가 보르헤스의 묘비명에 있는 '그 서슬 퍼런 칼날'을 새롭게 해석한다.
희망의 특성은 그것이 어둠 속에서 솟아난다는 것이다.
이 글은 작가의 슬럼프와 관계가 있다. 말을 잃어가고, 시력을 잃어가는 슬럼프. 소멸되어가는 현실에서 싸우며 저항하며 일어서려는 내적 고투가 담겨 있다. 시력을 읽은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가 소통하는 방법은 가장 연약한 부분을 통해서였다. 손바닥에 글을 쓰는 방식으로 소통한다.
인간의 연한 부분에 대한 신뢰를 확인했다고 할까요. 두 인물이 구원 없는 세상을 살았잖아요. 서로 마주치는 순간, 소통할 때 자신이 가장 연한 부분을 꺼내잖아요. 손바닥에 글씨를 써준다든지. 서로 침묵하는 순간. 그런 것들이 인간 안에 있는 것이었는데, 그 연한 부분에서 삶은 시작되어야 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어요.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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