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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 신화>에서 까뮈와 도스토옙스키의 대화

도스토옙스키의 <악령>의 키릴로프와 스타브로긴

by 오르 Ohr

까뮈와 도스토옙스키의 키릴로프


까뮈는 도스토옙스키를 부조리의 소설가로 해석한다. 그는 도스토옙스키를 현대 인간의 실존적 위기를 깊이 이해한 철학적 소설가로 본다. 『시지프 신화』에서 그는 도스토옙스키를 실존주의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보며, 신 없는 세계에서 인간이 어떤 논리적 결론에 이르게 되는지를 키릴로프(Kirillov)와 스타브로긴(Stavrogin)을 통해 보여준다. 까뮈는 그들이 신 없이 살려고 한 결과가 결국 자살이나 허무주의라는 가장 극단적인 결말로 이어졌다고 해석한다.


킬리로프는 까뮈에게 있어서 부조리의 순교자이다. 그는 자살을 통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까뮈는 이를 ‘논리적 자살’이라 명명한다. 반면 스타브로긴은 도덕적 기준이 사라진 공허한 인간으로,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느끼지 못한 채 자살로 나아간다. 까뮈는 이렇게 말한다. “킬리로프는 자신이 신이 되기 위해 자살하고, 스타브로긴은 자신이 신이 아님을 깨닫고 자살한다.” 이처럼 키릴로프는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 자이고, 스타브로긴은 모든 가치가 무너진 허무의 표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키릴로프는 영적 혼란과 병적 자만에 빠진 인물이다. 그는 신이 없다고 믿으며, 그 증거로 자신의 생명을 끊으려 한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러한 키릴로프를 경고의 대상으로 제시하며, 그 논리를 무너지게 만든다. 반면 까뮈는 키릴로프를 어느 정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키릴로프의 논리와 자유에 대한 집착을 철저하게 ‘부조리한 인간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존중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키릴로프가 자살함으로써 삶을 배신했다고 본다. 다시 말해, 도스토옙스키는 키릴로프를 병든 자로 그리고, 까뮈는 그를 부조리한 인간의 거울로 바라본다.



키릴로프의 논리적 자살


킬리로프는 까뮈에게 있어서 부조리의 순교자이다. 그는 자살을 통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려고 한다. 까뮈는 이를 ‘논리적 자살’이라 명명한다. 반면 스타브로긴은 도덕적 기준이 사라진 공허한 인간으로,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느끼지 못한 채 자살로 나아간다. 까뮈는 이렇게 말한다. “킬리로프는 자신이 신이 되기 위해 자살하고, 스타브로긴은 자신이 신이 아님을 깨닫고 자살한다.” 이처럼 키릴로프는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 자이고, 스타브로긴은 모든 가치가 무너진 허무의 표상이다.


도스토옙스키의 키릴로프는 영적 혼란과 병적 자만에 빠진 인물이다. 그는 신이 없다고 믿으며, 그 증거로 자신의 생명을 끊으려 한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이러한 키릴로프를 경고의 대상으로 제시하며, 그 논리를 무너지게 만든다. 반면 까뮈는 키릴로프를 어느 정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키릴로프의 논리와 자유에 대한 집착을 철저하게 ‘부조리한 인간의 극단적인 표현’으로 존중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키릴로프가 자살함으로써 삶을 배신했다고 본다. 다시 말해, 도스토옙스키는 키릴로프를 병든 자로 그리고, 까뮈는 그를 부조리한 인간의 거울로 바라본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가 신이다. -도스토옙스키 <악령>의 키릴로프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이반(Ivan Karamaz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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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운 독립과 교육적 자살


키릴로프는 “신이 없다면 내가 신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스스로 고난받고 죽음을 선택한 인간-신이었다고 본다. 전통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인(God-man)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신(man-god)으로 본다. 자신도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그리스도는 인간-신이다”라는 말은 신의 화육(神의 인간됨)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로 신이 되는 길을 의미한다. 까뮈는 이 발상을 매혹적으로 보지만, 그것이 생명을 부정하는 자살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


까뮈는 키릴로프의 순교적 논리를 부조리한 순수성의 한 극단으로 해석하지만, 삶을 긍정하지 못한 점에서 거부한다. "니체처럼 키릴로프에게 신을 죽이는 것은 자신이 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복음서가 말하는 영원한 삶을 이 땅에서 사는 길이다." 까뮈는 이것을 '고통스러운 독립(painful independence)'라고 표현한다. 키릴로프의 자살은 후대에게 인간이 신이 되는 것을 증명하고 보여주는 '교육적인 자살(a pedagogical suicide)'라고 말했다. 키릴로프는 적어도 자신이 믿는 바대로 행동하고 보여줄 책임감을 느꼈다. 키릴로프의 권총소리는 마지막 혁명을 위한 신호탄이라고 까뮈는 말한다. 키릴로프의 자살은 절망이 아니라, 이읏을 위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까뮈는 적고 있다.

“기독교인이면서도 부조리할 수 있다” “존재는 환상이며, 그것은 영원하다”

까뮈의 이 말들은 무슨 뜻일까?



『악령』의 질문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답변


까뮈는 <시지프의 신화> '키릴로프' 편에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악령』에 대한 응답이다”라고 말한다. 도스토옙스키의 후기 작품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초기의 『악령』에 대한 신학적이고 인간적인 응답이라는 뜻이다. 『악령』에서는 신의 부재가 낳는 정치적, 도덕적, 존재론적 붕괴를 키릴로프와 스타브로긴을 통해 보여주지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신을 둘러싼 의심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 용서, 부활이라는 희망을 알료샤를 통해 제시한다. 즉, 『악령』이 파괴된 영혼들을 묘사했다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치유와 회복을 이야기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마지막 장면에서 알료샤와 아이들 사이에 오간다. 그들은 친구 일류샤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알료샤는 “우리는 기쁨 속에 다시 살아날 거예요.”라고 말하며 부활의 희망을 전한다. 이는 단순한 위로나 감정의 회피가 아니라, 죽음 앞에서도 삶을 긍정하는 깊은 신앙의 표현이다. 도스토옙스키는 고통과 죽음을 넘어서 사랑과 희망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려 한다. 까뮈는 이러한 믿음을 존경하면서도, 신앙이라는 도약이 아닌, 삶 그 자체의 부조리함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우리는 그 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즐겁게 이야기하게 될 거야."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얄료샤의 말이다.



결론


카뮈는 도스토옙스키를 부조리를 탁월히 묘사한 작가로 보지만, 신앙으로 부조리를 해결하려 한다고 비판하다. 키릴로프는 논리적 자살, 스타브로긴은 허무주의를 상징하며, 카뮈의 키릴로프는 도스토옙스키의 복잡한 인물보다 추상적이다. 키릴로프의 “인간-신”은 인간의 자율성을 강조하며, 알료샤의 부활 확언은 기독교적 희망을 나타낸다. 카뮈는 이를 부조리와의 대면을 피하는 도약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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