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피론주의(Pyrrhonism)는 고대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자 피론(BC.365~270, 회의론의 원조)이 제시한 철학으로, 세상의 본질은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는 결코 파악할 수 없다는 인식론적 회의에서 출발한다. 그는 모든 주장에는 반대되는 주장도 그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은 확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준을 결여하고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전제 아래, 그는 '에포케(ἐποχή)'—즉 판단의 중지—를 실천적으로 제안하고, 그 결과로서 외부 세계의 혼란과 내면의 불안을 넘어서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상태인 '아타락시아(ἀταραξία)', 즉 평정심을 추구하였다. 이런 피론주의의 철학은 모든 형이상학적 주장—예컨대 신의 존재, 영혼의 불멸, 죽음 이후의 세계 등에 대한 주장을—판단 유보의 대상으로 놓으며, 명확하게 '모른다'고 선언하는 데 철학적 용기를 두었다.
이와 같은 회의주의는 현대 철학에서도 강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특히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중 한 사람인 알베르 카뮈와 유사한 정서를 공유한다. 카뮈 역시 형이상학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는 『시지프 신화』에서 명확히 선언하듯, 인간은 의미를 원하지만 세계는 침묵하며, 이 불일치는 '부조리'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존재 조건을 드러낸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부조리를 회피하거나 초월적인 의미로 환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피론주의와 유사한 출발점을 가진다. 두 사상 모두 '세계는 알 수 없다', '확실한 진리는 없다', '우리는 그저 현상에 반응할 뿐이다'라는 인식론적 겸허함을 공통적으로 견지한다. 그러나 이후의 방향은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피론은 판단을 유보하며 평정의 상태에 머물고자 한다. 그는 외부 세계의 갈등과 불안을 피하고, 오직 자신의 감각과 경험 안에서 조용히 머무는 삶을 택한다. 그러나 카뮈는 그 부조리와 마주하여 싸우는 길을 선택한다. 그는 인간이 세계로부터 의미를 받지 못하더라도,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행위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에포케나 침묵이 아닌, '반항(revolt)'이라는 윤리적이고 실존적인 태도를 제시한다.
그는 시지프처럼 끝없이 무의미한 돌을 굴리는 삶이라도, 그것을 의연히 받아들이고 끝까지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카뮈는 피론주의자의 침묵을 넘어선, '삶에 대한 윤리적 저항자'로 나아간다. 그렇다면 카뮈를 회의론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다. 그는 기존의 형이상학, 특히 기독교적 구원론이나 실체적 진리를 믿지 않으며, 세계를 인식 가능한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 시각에서, 의미 없음의 세계를 인정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회의론자와 다른 점은, 단순히 '모른다'고 말하고 멈추지 않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야 하며, 의미 없는 삶에도 충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그는 일종의 '실존적 회의론자'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의미없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즉, 이성이나 감각을 통해 진리를 알 수 없다는 인식론적 회의는 유지하면서도, 삶 자체를 실천적 결단의 장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는 전통적인 피론주의자와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결론적으로 카뮈는 피론주의와 유사한 회의주의적 출발점을 가지지만, 침묵 대신 반항을, 평정 대신 투쟁을 선택함으로써 실존주의적 윤리로 나아간다. 피론주의가 판단의 중지를 통해 마음의 평안을 추구했다면, 카뮈는 그 부조리를 끝까지 견디며 살아가는 데에서 인간의 존엄을 찾으려 했다.
이러한 차이는 우리가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어떤 삶의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 대한 두 철학자의 서로 다른 해답이며, 둘 다 오늘날까지도 깊은 사유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피론주의와 알베르 카뮈는 모두 본질을 알 수 없는 세상, 즉 인식의 한계와 세계의 불확실성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삶의 태도는 정반대다. 피론주의는 어떤 주장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판단을 유보(에포케)하고, 외부의 혼란에서 벗어나 평정심(아타락시아)을 얻으려 한다. 이는 세상의 부조리와 무의미에 대해 거리를 두고, 관여하지 않음으로써 내면의 고요를 지키려는 회피적 태도라 할 수 있다.
반면 카뮈는 인간이 의미를 원하지만 세계는 침묵한다는 부조리한 조건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는 부조리 속에서도 삶을 중단하지 않고, 오히려 그 모순을 직시하며 저항과 열정, 자유로운 선택을 강조한다. 피론주의가 고요한 물러섬이라면, 카뮈는 격렬한 참여다. 둘 모두 ‘세상의 본질은 알 수 없다’는 데 동의하지만, 피론은 침묵으로, 카뮈는 반항으로 응답한다. 이는 같은 출발점에서 비롯된, 전혀 다른 삶의 처방이다.
나는 저항한다, 고로 존재한다. -카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