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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Dec 07. 2021

에필로그

《공포와 전율》읽기 안내서 12

에필로그


에필로그에서 요하네스는 믿음은 충분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더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다시 한번 한다. 어떤 세대라도 이전 세대로부터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을 배우지 못하고, 그 자신의 세대에서 배워야만 한다고 결론적으로 주장한다. 인간에게 필수적인 것은 정열(passion)이며, 그 정열로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우리는 사랑을 이전 세대로부터 배울 수 없고, 이전 세대가 떠난 지점에서 출발해서 더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높은 정열은 믿음이며, 신앙과 관련하여 우리 모두는 출발선이 같고, 아무도 믿음보다 더 나갈 수가 없다. 헤라클레이토스. 플로톤의《크라튈로스》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두 번 같은 냇물을 건너지 못한다.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us)는 '아무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주장했다. 헤라클리투스의 제자 제논(Zeno)는 더 나아가고자 하여, '아무도 동일한 강에 한 번도 발을 담글 수 없다'고 주장했다. 



아니다, 한 번도 건널 수가 없다. 


텐네만의 <철학사> 제 1권에서 제논이 말한 것이다. 이보다 더 나아가, 제논과 엘레아학파(the Eleatics)는 운동(motion)을 부정했고 헤라클레이토스가 버렸던 것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이 문제의 핵심은, 비록 윤리적인 것은 발설(disclosure, 말함, 밝힘, 누설)을 요청할지라도, 아브라함은 말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이 자기가 하려는 과업을 숨기는 것이 "윤리적으로 방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관계로 인하여 아브라함은 윤리적인 차원보다 더 높아졌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에게만 독특하게 나타난 것이며, 오직 아브라함에게만 한 것이기에, 이로써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결과, 이 명령은 아브라함을 보편적인 것(윤리)으로부터 고립시키게 된다. 이 명령이 독특하고 개인적이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시험을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브라함의 최대 유혹은 윤리적인 것이다"나는 심히 불안합니다. 왜냐하면 나와 그 밖의 모든 사람이 옳다고 알고 있는 일을 해야하는 지속적인 시험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말하면, 누가 이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다. '아들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아브라함은 생각하고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데 그 명령에 순종해야만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유혹은 윤리였다. 윤리적인 것을 무시하거나 초월해야만 했다. 윤리적으로 행하면 안되는 시험이었다.


아브라함의 역설을 이해하려면, 그의 이야기를 아브라함의 관점으로 봐서는 안되고, 제삼자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내가 아브라함을 길가에서 만난다고 가정해보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 이삭을 죽이라고 했다는 사실을 나에게 말해준다면, 나는 아브라함을 미친놈 취급했을 것이다. 이삭을 죽이는 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지를 입증할 만한 증거를 아브라함이 제시할 수 없다. 하나님의 명령이 아브라함에게 개인적으로 전달되었고, 다른 누구에게도 그것을 공유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다. 만일 아브라함이 그의 시련을 공유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더 이상 그와 하나님과 공유하는 사적인 시련이 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이 그것을 공개적으로 발설하는 순간 그와 하나님 사이에 심연(gulf)이 생길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한 대답도 난해하다.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말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아브라함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트리고 직접적인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해주었다. 불합리의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번제할 어린 양을 제공하시리라", 이 말은 아브라함 자신만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아브라함은 불합리속으로 믿음의 비약을 감행했기에 그 자신만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은 진실을 말했지만, 자신만 이해할 수 있는 진실이었다. 불합리와 역설(Irony and paradox)은 둘 다 모순을 다루고 있으며, 그래서 아이러니가 역설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유일하게 적합한 방식이어야한다는 말이 맞다. 


에필로그는 또 다시 머리말의 주제인 '모든 사람이 믿음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믿음을 건너 뛰기를 원한다(everyone wants to move beyond faith, thinking that it is easily achieved.)'로 돌아간다. 헤겔은 원대한 역사이론을 만들었다. 헤겔의 역사철학에 따르면, 모든 것은 최종적이며, 유토피아적인 종합으로 천천히 진보하고 있다. 우리는 그 진리에 도달할 때까지 과거 세대의 지식과 경험 위에 쌓아간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맥스웰 방정식이나 뉴톤의 법칙 이전에는 발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천재였을지 모르나, 과거의 발견 위에 자신의 업적을 쌓았다. 


그러나 믿음은 과학과 같지 않다. 믿음은 과학처럼, 이전 세대가 남긴 자리에서 시작할 수 없다. 사랑처럼, 믿음은 일종의 정열이다. 믿음의 가치는 무관심하게 믿음을 반사시킬 수 없으며, 자신을 믿음에 던지는 정열에 있다. 믿음은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지, 지식으로 체계화하는데 있지 않다. 


《공포와 전율》의 마무리 말로 헤라클레이토스와 제논을 언급해서 이러한 논지를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불이다. 만물은 계속해서 변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가 지속적인 변화의 예로,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는 말을 했다. 강물을 구성하는 물은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다른 물이 되기 때문이다. 제논은 '제논의 역설'로 유명하다. 한 지점에 도달하려면, 먼저 그 지점의 반에 도 달해 야만 하고, 거기에 도달하기 전에 그 지점의 반에 도달해야만 한다는 논리가 계속 이어진다. 언제나 목표보다는 더 짧기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제논은 헤라클레이토스와 반대로 결론을 내린다. '아무런 변화도 없다. 모든 운동은 환영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정적인 힘이나 요소로 우주를 설명하고자 했던 이전의 이론에 응답하여,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이론을 주창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역동적인 우주를 보았기에, 그는 모든 것은 불이라는 주장으로 역동적인 우주를 생생하게 표현했다. 제논은 헤라클레이토스의 지속적인 변화를 출발점으로 사용해서, 더 나가려고 시도했고, 변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헤겔주의처럼, 제논은 그의 전임자 헤라클레이토스를 거리를 두고 성찰하는 방식으로 이해했을 뿐이다. 만일 그가 헤라클레이토스의 관점을 진실로 이해하고자 정열을 가졌더라면, 아마도 그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이론을 넘어서려고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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