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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 Ohr Dec 09. 2021

안셀무스, 최후 교부철학자_최초 스콜라철학자

20대에게 들려주는 철학 이야기 9

'중세는 암흑기이다'라는 말이 있다. 더 이상 중세를 공부할 필요가 없다는 말처럼 들린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무지의 지'가 생각난다. 우리는 중세를 모른다. 모른다는 자각이 있어야 배움을 얻게 된다. 예를 들어, 중세를 암흑기라고 하는데 중세의 예배당의 건축양식은 빛이 가장 큰 특징이다. 고딕 건물에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창문을 더 크게 만들었다. 빛은 신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예를 들자면, 중세는 맹목적인 신앙만 있을 뿐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중세 시대에는 이성으로 신앙을 설명하고자 했으며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추구했었다.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알고 싶은 욕망이 생기지 않는가? 우선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네.



중세는 철학자로 분류하면 보이티우스(475-525)에서 르네 데카르트(1596-1950)까지라고도 하고, 시기적으로는 대략 5세기-15세기까지라고 분류하기도 한다. 중세의 철학은 세 가지로 구분되어 전개되며 대표적인 사상가는 다음과 같다.



중세철학의 전개


1. 교부(교회의 아버지)철학: 테르툴리아누스와 아우구스티누스

2. 스콜라(학교)철학: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3.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 둔스 스코투스와 윌리엄 오캄



낭중지추, 안셀무스(Anselm of Canterbury)


안셀무스(1033-1109)는 낭중지추다. 낭중지추란 주머니 속의 송곳이라는 뜻으로, 제아무리 숨기려 해도 그 탁월함이 드러나는 사람을 의미하는 고사성어이다. 그는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지위에는 관심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아니 지위에 오르기를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1078년에 베크 베네딕트 수도원장이 되었고, 1093년에는 영국의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이 자리는 최고의 종교적 권한과 국왕 다음으로 가는 정치적 권한을 소유한 자리이다. 안셀무스의 어떤 점이 좋아서 사람들은 그를 좋아했을까? 제자를 향한 무한한 사랑이다. 그는 제자들을 헌신적이면서도 무한한 사랑으로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 수사들로부터 무한한 존경을 받게 되고 그를 '낭중지추'라고 부르는 것이다. 안셀무스를 최후의 교부철학자이자 최초의 스콜라철학자라고 부른다. 스콜라철학이란 철학을 성경과 신학을 해석하는데 적극 활용하여 이성으로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는 학문이다.



안셀무스, 오직 이성으로


베크 수도원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그의 《모놀로기온》에서 이성적으로 신존재를 증명하고 있다. 안셀무스는 "이성적 정신은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이며, 최고의 것"이라고 이성을 극찬하였다. 안셀무스는 당시의 그리스도교 신학을 진정한 의미의 학문으로 바꾸어 놓은 최고의 인물이다.


오직 이성으로만 신앙과 신앙적인 요소들을 증명할 수 있다.


안셀무스는 이성만으로 진리인식에 이르려는 시도를 하였다. 안셀무스의 신학적 방법은 성경을 인용하지 않고, 성경의 권위를 사용하지 않으면서, 이성을 사용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의 신학방법론은 기독교 신자의 명제를 전제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교도의 반론을 전제로 해서 그 비판의 모순을 밝히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런 점에서 안셀무스는 철저히 합리주의자이다(Anselm is simply an extreme rationalist). 안셀무스의 신학의 목적은 이성을 통해서 신앙에 도달하자는 게 아니었다. 단순히 불신자의 주장의 모순을 보여줌으로써 신앙의 깊고 풍성한 세계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안셀무스는 '오직 이성으로만'이라는 신학방법론을 사용했다. 중세는 결코 신앙만 강조한 이성의 '암흑기'가 아니다.



안셀무스, 존재론적 신증명


안셀무스는 신율적 인식론을 가졌다. 신율적 인식론이란, '신의식'에서 출발하여 자연과 역사에 대한 인식으로 나간다는 플라톤이나 아우구스티누스와 공유하는 인식론이다. 반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율적 인식론을 가졌다.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재발견함으로써 '자연 인식'에서 출발하여 신인식에 이르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안셀무스와 토마스는 같은 중세의 사상가이지만, 안셀무스는 11세기 사람으로 플라톤주의자라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200년 후대 사람으로 13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라는 차이가 있다.


중세철학의 특징은 신존재증명을 하는 것이다. 안셀무스는 플라톤의 실재론에 바탕을 주고 '존재론적 신증명'을 시도했고,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바탕을 두고 '우주론적 신증명'을 시도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신존재 증명 방식은 모두 '현실인식 또는 자연인식'이라는 외부세계에서 출발하지만, 안셀무스의 신존재 증명 방식은 '신의식' 즉 선험적인 내면성에서 출발한다. 캔터베리의 대주교 안셀무스는 1078년 "이성으로 신을 증명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여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였다. 안셀무스가 말하는 신은 인간이 상상하는 것을 넘어서는 가장 큰 존재(that-than-which-a-greater-cannot-be-thought)를 말한다. 신은 최대한으로 위대한 존재(A Maximally Great Being)이다.


"신은 정의상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존재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보다 더 크다. 따라서 신은 실제로 존재해야만 한다." 안셀무스는 그의 독창적인 저작 《프롤로기온(Prologion)》의 2~4장에서 이를 논증한다.


안셀무스의 존재론적 신증명을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 이성이 신이라는 절대관념을 떠올리는 자체가 신이 존재하는 증거라는 주장이다.


“나는 믿기 위해 이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 ...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진정으로 믿고 사랑하는 진리를 조금만이라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1078년에 존재론적 신존재 증명을 주장했던 캔터베리의 주교 안셀무스. 그는 유명론을 거부하고 실재론의 입장에 서 있다.



안셀무스의 대속 교리


안셀무스가 베크의 베네딕트 수도원장으로 있을 때 '신존재증명'을 했다면, 그가 영국의 캔터베리 대주교로 있을 때 국왕과 갈등 중에 3년간 망명생활을 하면서 그의 유명한 저서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를 출판했다. 이 책은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한 이유를 설명한 책이다. 안셀무스는 이 책에서 교부시대부터 전해내려오는 속전 교리를 배척했다. 속전 교리란,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탄에게 지불된 속전이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안셀무스는 인간의 죄의 심각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충만함을 부각시키면서, 인간이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여 무한한 죄책을 해결하기 위해서 법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강조했다. 하나님의 법정에서 무한한 죄를 지은 인간이 '무죄판결'을 받도록 예수 그리스도가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이 무한한 죄를 해결하고자 인간이 되셨다고 주장했다.


사람이 지은 죄이기에 사람 자신이 갚아야 하는데, 그 죄가 하나님께 지은 무한한 죄라 그것을 갚을 능력은 무한한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신인(神人, God-man), 즉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신 분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 안셀무스, 《하나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Cur Deus Homo)》


감사하나이다 좋으신 주님,

이전에는 당신이 선물로 주신 신앙을 내가 '믿었다면'

이제는 당신이 비추시는 것을 내가 '이해'하기에

내가 당신이 계시지 않다고 믿고 싶더라도

[당신이 계시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기에 감사하나이다.

존재론적 신증명을 한 이후에, 안셀무스가 드린 기도문이다.



안셀무스: 선험적 방법으로 신증명. 플라톤적

토마스: 경험적 방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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