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설오름, 엉또폭포, 서귀포전통오일시장
< 5. 4. 목 >
지독한 바람, 인정사정없는 비
밤새 악을 쓰고도 남은 울분이 있더냐
그렇게 울고도 남은 눈물이 있더냐
혼자 찢어지기는
혼자 울기는
그렇게도 싫더란 말이냐
서 있는 것 모두
잠들어 있는 것 모두
넘어뜨리고
깨우고 나서야 속이 시원하겠냐
제주는 몇 날째
함께 울고
함께 흔들리고 있다
밤새 온 비, 창문을 흔드는 바람.
지치지도 않는다.
제주 해녀들의 긴 숨만큼, 고래 심줄만큼 질기고 질긴 제주의 바람, 비다.
어느 집 족보를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집 밖을 돌아다니면서도 떠나지 않는 덩치 큰 개 한 마리.
비를 맞고 바람에 휘청이면서도 온 텃밭을 더듬고 다니다가, 1층 106호 앞에서 멍하게 창 안을 들여다본다.
음식 냄새를 찾아온 것이리다.
자유는 생존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고통을 안았을 때 가능한 것이다.
제집으로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인가, 들어가고 싶지 않은 것일까?
녀석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
되도록 외출을 삼가달라는 재난 문자가 와 있다.
한라산 등반을 했던 창원의 고등학교 학생 10여 명이 저체온증으로 실려 갔다는 뉴스도 있었다.
그 학교 학년부장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을 생각하며 걱정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래도 차는 출발해야 한다.
파도처럼 리듬을 타고 차창을 두드리는 비, 앞을 가리는 빗물.
천정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귀가 먹먹하다.
우산을 쓰고 이상한 슈퍼마켓(미디어아트 전시장)으로 들어가고 있는 아이들.
선생님 부모님 속이야 어떻든 바람아 불어라, 비야 더 와라 하겠지.
‘200m 앞에서 우회전이야.’
‘알았어, 끼어들기 하지 말란 말이지.’
앞이 잘 보이지 않으니 미리 준비하라는 내 말에,
바로 알았다는 신경질적인 반응이 되돌아온다.
말을 아껴야 할 때가 왔다.
몇 번씩 생각하고 우물거렸다 내놓아야 할 말이라는 놈.
물레를 돌리는 발
빙빙 돌아가는 흙을 주무르는 손
옹기는 모른다
어떤 모습으로 태어날지
도공의 맘대로 만들어지는 옹기
내가 만든 말
나만 아는 말
받는 사람은 모른다
사위가 추천한 현지인들에게 유명한 몸국 맛집.
제주항 부근 신설오름(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고마로17길 2)
진하게 곤 돼지고기 뼈 국물과 물러질 정도로 삶은 고기 살과 모자반이 마치 풀을 쑤어놓은 것 같다.
과음으로 속이 쓰린 사람들에게는 위벽을 도배하듯이 발라줄 것 같다.
알배추잎에 따뜻한 밥과 가는 뼈가 씹히는 갈치젓을 올려 한 입.
된장 바른 매콤한 청양고추를 더하면 입안은 화해지고,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한 그릇에 8,000원, 가격까지 착하다.
주변에는 알려주지 않는 걸로, 너무 사람들이 많아지면 기다리기 힘드니까.
한라산 동쪽을 휘감고 도는 산록도로.
평상시에는 앙상한 바위만 보이던 계곡에 물들이 쏟아진다.
찻길까지 덮치는 빗물.
느릿느릿 앞을 가는 차들, 시야를 가리는 바람과 빗줄기 때문에 너무 지루하다는 아내.
1시간을 넘게 달렸다.
경광등을 반짝거리는 경찰차가 막아선다.
공사 중이니 차는 들어갈 수 없단다.
비옷을 입고 우산을 또 쓰고, 발목을 덮는 빗물 속을 걷는다.
한 30분이나 걸었을까?
물안개가 높게 피워 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계곡을 뒤엎고 빠르게 달려가는 물들.
사람들이 많다, 어떻게들 알고 왔는지.
하늘에서 바로 내리꽂는 엄청난 물 폭탄.
일 년에 몇 번 볼 수 없다는 엉또폭포( ‘엉’은 바위보다 작은 굴을, ‘또’는 입구를 뜻한다. ‘작은 굴로 들어가는 입구’의 폭포라는 의미)다.
그냥 와 다.
힘들게 몸을 젖으며 와서 그렇고,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 더 그렇다.
제주에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한참을 엉또의 물들을 바라보다, 놀라다, 감탄하다 온다.
너무 오래 기다렸나 보다
모두 손잡고 한꺼번에 쏟아내는 울분
또는 환희
무엇이면 어떤가
맘껏 하고 싶은 대로 소리쳐보는 것이지
하루라도 그런 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간 만큼 힘들게 돌아가는 길.
빗속에서도 청양고추의 알싸한 향을 뿜어내는 귤꽃향을 맡으며.
서귀포전통오일시장(4일, 9일)
빗속에서도 찾는 사람들은 많다.
천정을 때리는 빗소리 때문에 옆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떡볶이, 고추튀김, 오징어튀김을 사 들고, 부드럽고 상큼한 무가 들어있는 빙떡은 맛보고.
크기가 좀 다를 뿐이지, 장은 사람 구경하러 가는 것이다.
제주로 오가는 모든 길이 막혔다.
이 안에서 우리끼리 죽이든 밥이든 알아서 해야 한다.
이것도 심리적인 해방감인가?
살짝 불안하면서도 뭔가 찌릿함이 있다.
잘살아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