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돌개, 올레길 7코스, 돔베낭길, 검은 몽돌 해변, 법환포구
< 5. 3. 수 >
추억이 앞서가는 길
기쁨이 두 배
슬픔도 두 배가 되는 길
나를 찾아가는 길
내가 변한 것이 아니다
세월이 자꾸 새 옷을 입혀
너무 많이 입혀
아무리 벗어도 내가
나오지 않는 것일 뿐
벌거벗은 나를
쉬 보여주지 않는 것
그래야 어른이 되는 것이다
오직 그분만이 알고 있을
추억과 함께 걷는 길
또 새 옷을 입는 일
9시 13분 차는 좁은 뒷길을 잡아 산록도로를 향해 오른다.
한라대학교 승마장에서 좌회전.
갓길에 점점이 박혀있는 차들.
고사리 앞치마를 입은 사람들이 산에 묻힌다.
하루는 골프 하루는 산으로 고사리 채취하러 다닌다는, 어제 제주방송에서 보았던 아주머니의 웃음에서 기름기가 좔좔 흘렀다.
1100도로에 접어든다.
경사진 내리막을 힘차게 달리다 속도를 더 높여 오르막으로 접어들면 배꼽 아래가 쏴 해진다.
그 상태로 더 악을 지르며 하늘만 보이는 도로를 질주하다 다시 내리막으로 쿵 떨어지면 간도 함께 떨어진다.
소원 풀이하는 아내, 체중조절 당하고 있는 나.
270도 꺾어지는 길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으니 몸이 차 밖으로 튕겨 나갈 것 같다.
아파트 창밖도 잘 내려다보지 못한 나,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어서 더 재미있다는 아내.
로또처럼 맞는 게 없다.
그래도 37년을 잘도 살고 있다.
야자수 길로 접어들며 차는 좀 얌전해졌다.
비릿한 잣밤꽃 향, 아카시아처럼 상큼한 귤꽃 향이 훅 다가온다.
제주시보다 훨씬 휴양지다운 서귀포.
하루 주차비 2,000원을 아껴보겠다고 빙빙 돈다.
공영주차장은 만차.
하는 수 없이 가게 앞에 차를 세우니 번개처럼 달려오는 할머니.
꼭 빼앗기는 기분이다.
10시 16분 외돌개를 향해 계단을 내려선다.
수학여행 온 고등학생들이 길을 꽉 메우고 흘러간다.
녀석들의 설렘이 느껴진다.
인솔하는 선생님들의 갑갑한 심사도 함께 다가온다.
외돌개를 배경으로 반별로 단체 사진을 찍고 있다.
녀석들아! 귀찮은 표정 짓지 마라, 평생 셀 수도 없이 보게 될 사진이란다.
외돌개 이야기 ( 개는 움푹 들어온 만, 그러니까 돌 하나가 움푹 들어온 바다에 서 있는 곳)
할망바위 : 아주 먼 옛날 이곳 해안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아가던 금실 좋은 노부부가 있었다.
하루는 할아버지가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육지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만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를 알 길이 없는 할머니는 매일 바닷가에 나가 할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몇 날 며칠을 할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던 할머니는 “하르방, 하르방”하며 목 놓아 울다 그 자리에서 바위가 돼버렸다.
할머니가 돌이 된 후 할아버지의 시신이 떠올라 할머니 곁에서 돌이 되었다.
외돌개 끝자락의 키 작은 소나무는 할머니의 머리카락이다.
자세히 보면 이마, 슬픈 눈망울, 콧등의 윤곽이 드러나고 할아버지를 애타게 부르는 벌린 입 모양도 선명하다.
장군바위 : 고려말 최영 장군이 제주를 강점했던 몽골 잔족 세력인 묵호의 난을 토벌할 때, 외돌개에 옷을 입혀 거대한 장수로 치장해 놓았더니 범섬에 숨어 있던 묵호들이 대장군의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모두 자결했다고 한다.
섶섬 문섬을 지나 범섬을 바라보며 올레 7구간을 천천히 걷는다.
서귀포여고는 체육대회를 하는지 낭자들의 함성이 우렁차다.
무슨 수련원을 짓는다며 바닷가 길을 막아버렸다.
동네를 통과하는 포장도로가 시원한 콩물국수를 맛있게 먹다 씹히는 돌 같다.
이런저런 이유로 원래의 코스가 많이 바뀌고 있단다.
좋은 기억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다.
많은 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돔베낭길 다리 옆.
빨간 우체통에는 엽서가 들어있다.
“잘 견뎌주었다. 당당하게 새로운 길을 걸어가라.”
나에게 쓴 엽서를 우체통에 넣었다.
집에서 받아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다리를 건너 야자수가 무성한 길로 접어든다.
10년도 훨씬 더 전에 자전거로 제주를 일주할 때 홍해삼에 소주를 마셨던 포장마차.
그대로 있다.
좁은 길이 넓은 광장으로 변했고, 할머니의 허리는 더 땅에 가까워졌다.
멍게를 좋아한다는 아내에게 제주에는 멍게가 나오지 않는다.
통영에서 모두 가져온 것이라며 직접 잡은 홍해삼을 내놓으셨는데.
오늘은 큰 플라스틱 대야에 멍게가 가득하다.
그 후로 제주에서도 멍게가 살게 되었나?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내는 멀리 앞서 혼자 가버렸다.
캬! 그 소주 꼭 함께 먹고 싶었는데.
꽃이 진 유채밭을 가로지르고 검은몽돌해변으로 접어든다.
어떻게 갈지 길을 찾다가, 몽돌 사이로 흐릿하게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들을 본다.
돌을 조금씩 옆으로 밀어 구불구불하게, 한 사람 정도 지나갈 길이 생겼다.
바로 이것이 올레길이지.
섭섭했던 마음이 아주 조금 풀린다.
법환포구로 접어드는 언덕 위 소낭집(소나무가 있는 식당, 제주 서귀포시 막숙포로37번길 12 )
낙지덮밥이 딱 먹을 수 있을 만큼 맵지만, 숟가락을 놓을 수 없을 만큼 맛이다.
새우튀김과 계란찜은 추가메뉴, 샐러드 미역냉국과 콩나물은 맘대로 먹을 수 있다.
사람들로 꽉 찬 음식점은 맛이 확실하다.
혀에 새겨진 맛은 잊히지 않는 첫사랑 같은 것이다.
걸을 수 없을 만큼 비가 온다.
카카오택시를 부르고 외돌개로 가서 차로 다시 법환포구로 온다.
용천수의 남탕을 보고,
소품샾 제스토리 (제주 서귀포시 막숙포로 60)로 들어간다.
두 층에 가득한 선물들이 다양하고 제주다워 좋다.
범섬을 흐리며 오는 비는 점점 굵어지고 있다.
태풍이 올 때면 온몸이 흔들리며 제주 법환포구에서 누구라고 기상 상황을 전한 것은 태풍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상륙하는 곳이 주로 법환포구라서란다.
집에 걸어놓을 줄 달린 인형, 손녀에게 줄 몇 가지 선물들을 산다.
아뜰리에 안 (제주 서귀포시 막숙포로 167)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세운다 만다 시끄러웠던 때 왔던 곳.
사각형 작은 세 동의 색칠하지 않은 콘크리트 구조물이 단순해서 좋았던.
범섬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어서 친근했던.
그 집이 그대로 있다.
주변에 큰 가게들이 생겼음에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그대로.
반갑고 고맙다.
커피를 마시며 창문 밖 바다를 보고,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넘어 범섬을 보고.
이렇게 몇 시간을 가만히 있어도 힐링이 되는 여행.
이전에 생각지도 않았던 형태의 여행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