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안개와 사슴이 머무는 그곳

제주민속오일시장, 빕스, 산록도로, 1100고지 휴게소

by 고주

< 5. 2. 화 >

주저앉은 시골집 부엌문이 열리는 소리, 삐그덕.

쓰러진 기둥에서 녹슨 못이 빠지는 소리, 끼이잉.

발목 무릎 허리 목에서 별별 소리가 다 난다.

내일 아침에는 깨우지 말라던 아내도 몇 번이고 나누어 일어난다.


아들이 오후 1시 수원에서 수업을 들어야 하니, 8시 비행기를 태워야 한다.

제주 김포 수원까지 승용차 비행기 전철이 바톤 터치해가며 옮겨줄 것이다.

무슨 재벌 손자도 아니고, 가난한 서생의 아들이 누리는 호사란?

살면서 이런 경우가 몇 번이나 있겠나, 막 지르자.

곧 미국으로 아침에 출근하는 때도 오려나?

그러면 나라는 무슨 소용?

내일의 시간은 생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것일 수도 있으니.


20230502_072050.jpg


아들은 다리를 절며 갔다.

이주 후에 또 보자고, 그때는 낚시만 줄창 하겠다고.

공항 근처 제주민속오일시장 (2일, 7일)에 왔다.

점방 문을 열기에는 좀 이른 시간, 넓고 깨끗하다.

처음 눈에 띄는 것은 화사한 꽃들.

묘목 모종 종자 고사리 나무들 심지어 도자기까지 없는 것이 없다.

펄펄 끓는 어묵을 보면 내 심장이 날뛰지.

진하고 칼칼한 국물 한 숟가락 털어 넣고, 쥐똥고추 동동 뜨는 간장에 야들야들한 어묵을 퐁당 담가 와작 깨문다.

또 신나는 하루가 오독오독 씹힌다.

고추튀김 호떡 팥빵을 한 손에, 어묵 포장은 다른 손에.

맑은 아침이 대롱대롱 흔들리며 따라온다.

빨간 토마토를 자꾸 돌아보는 아내여.

둘째가 설탕에 찍어 먹는 걸 좋아한다고 옹알이하는 아내여.

이제 당신만 생각하시라, 좀 놓아주시라.


20230502_104337.jpg


비행기가 내리고 오르는 모습을 훤히 보며 느긋하게 이른 점심을 먹는다.

손녀와 함께 와서 음식이 코로 들어갔는지 입으로 들어갔는지 모르게 마치고 후다닥 나갔던 빕스.

영상통화에서 아이는 합부지만 찾는다.

트램플린을 타는 것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아직 기억에 남는 모양이다.

화이트 와인에는 연어 짭조름한 바지락 가리비만 집중 공략.

레드 와인에는 슈바인스학세.

이제는 회복에 많은 시간이 걸리니 음식이라도 많이 보충하자.


20230502_133116.jpg


숙소 뒤로 나 있는 도로를 오른다.

차라도 내려오면 비켜 갈 수 있을지 걱정되는 좁은 길이다.

공동묘지를 지나고 녹슨 쇠사슬로 잠근 목장도 몇 개 지난다.

후두둑 풀숲으로 달리는 고라니도 있다.

고사리 채취하다 실종되는 경우가 있다고 경고하는 현수막도 보인다.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공포다.

얼마나 그렇게 고양이 걸음으로 차는 걸었다.

차 소리가 들린다.

도로다, 지도에 한라산과 가장 가깝게 그려진 바로 산록도로다.

한라산을 바로 밑에서 받치고 있는 오름들이 우뚝우뚝 솟아 있고, 그 아래로 말들이 여유롭게 풀을 뜯는 목장이 펼쳐진다.

모두 와! 하고 소리를 친다.

일단 동쪽으로 달려보자.

반듯하게 난 도로, 하늘만 보고 힘차게 오르다 갑자기 푹 꺼지는 높낮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다.

어제 마방지에서 성판악까지 갔던 택시 운전사의 곡예 운전에 분통을 터뜨렸던 아내가, 날개만 펼치면 날 것 같은 속도로 내달린다.

액셀에서 발을 떼지 않는다.

아우토반에서 원 없이 달려보고 싶다는 소원을 풀고 있다.

그 소중한 가족을 태우고.

팅팅 부은 간을 쪼그라뜨리고 있다.

돈 주고 바이킹을 타는 것처럼 바보 같은 일이 없다는 나를 태우고.


20230502_135448.jpg


1100고지 휴게소.

하얀 사슴이 백록담을 쳐다보고 있다.

물이 담긴 습지에서 청둥오리가 원산포격을 하고 있다.

졸병이 징하게도 말을 듣지 않은 모양이지.

오리에게는 아직 구타가 남아 있는가?

서귀포 쪽에서 동쪽으로 돌아 다시 원점으로.

돈네코 성판악 관음사 입구들을 지나쳤다.

아슬아슬하고 시원한 드라이브.

해 질 무렵이면 피해야 할 곳이다.

고라니 멧돼지라도 만나면 차가 온전하지 않겠다.

느림보 ㅎ자 차가 앞에 있으면 피해 갈 수도 없는 구불구불하고 좁은 도로다.


맥주를 홀짝이며 등이 익어가는 테라스 탁자 앞에서 지난 일정을 정리하는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 번 놓치면 다시 쓰는 것이 쉽지 않은 일.

누가 시키지도 않은 일.

환영받고 하는 일도 아니다.

단지 나에게 보내는 주문이고, 나에게 보여준 호의에 대한 예의다.

널부러진 찬밥이 되고 싶지 않은 아직 식지 않은 내 열망,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벌써 한달살이의 절반이 지났다니.

내일부터는 더 활기차게 달리자.

아자 아자 파이팅.

keyword
이전 12화그 산에는 물이 고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