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판악, 백록담
< 5. 1. 월 >
손흥민이가 1골 1도움 2 골대를 맞춘 선방에도 토트넘은 졌다.
눈이 까슬까슬해도, 기분이 꿀꿀해도 일어나야 한다.
이른 5시 50분.
컵라면 하나를 다 먹고 화장실을 불나게 드나든다.
성판악 주차장은 만차이니 제주대 앞 제1주차장에 차를 놓고 오라는 문자가 와 있다.
참 좋은 세상이다.
애조로를 지나 제주마방목지에 주차한다.
택시를 타고 성판악 관리사무소에 내리니 7시 30분.
“신분증과 예약 바코드를 보여주세요.
심장병, 당뇨, 고지혈증이 있는 분은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최근에 싱가포르 부부가 등산하다 남편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경우가 있었습니다.
닥터헬기가 출동했지만, 저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어요.
무조건 1인당 물 3병은 가져가세요.
위에서는 물 한 방울도 주는 사람 없어요.
천천히 자신의 체력에 맞게 가시면 됩니다.”
작달막한 직원이 엄포를 놓는다.
내 속을 훤히 보고 있는 것 같아 겁난다.
야자수잎 매트와 돌계단, 나무계단이 엇갈리며 완만한 경사길을 걷는다.
때죽나무, 졸참나무, 서어나무 숲을 지나면 삼나무 길이 펼쳐진다.
두 여자는 앞에 사람이 있는 꼴을 못 보겠다는 듯이 질주하고 있다.
아이를 업고 가는 가족, 반바지만 입고 씩씩하게 행군하는 외국인, 완전군장을 한 아가씨 친구들.
운동화를 신고 스틱도 없이, 편안한 운동복 차림으로 가는 우리는 무슨 배짱인고.
속밭 대피소(1,000m)
4.1km를 왔다.
가볍게 물 한 모금씩을 마시고 바로 출발.
조릿대잎이 바람에 찢겨 하얗게 변했다.
키는 육지보다 훨씬 작다.
그만큼 살기가 퍽퍽하다는 이야기겠지.
오르막의 경사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여전사들은 보이지 않고 고관절이 아프다는 아들은 자주 걸음을 멈춘다.
내 종아리도 쥐가 나려는지 묵직해진다.
가쁜 숨을 쉬며 통행로 줄에 기대는 사람,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는 사람.
물어보고 싶다, 왜 오르느냐고?
아들은 마지막 산행이라고 선언한다.
내려올 것을 왜 오르는지 도저히 모르겠단다.
사진이라도 찍고 오르지, 평상시 걸음보다 늦게 가는 것도 사실 힘든 일이다.
바람막이도 없이 올라갔는데 춥지 않을까 걱정이다.
사라오름 입구라는 팻말이 있지만 40분을 더 쓰고 다녀올 엄두가 나지 않는다.
진달래밭 대피소(1,400m)
갑자기 나타난 분홍 진달래꽃.
아직 꽃망울이 덜 터진 것도 많다.
오늘부터 정상에서 하산 시간이 14:00라고 적혀있다.
점심을 먹는 사람들, 마지막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람들.
우리 집 여자들은 올림픽이라도 참전했는지 도통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아직도 남은 거리가 만만치 않은데 주변을 볼 수가 없는 나무숲이니, 지루한 코스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알겠다.
힘들면 여기서 쉬라고 했는데, 아들은 오만상을 찌푸리면서도 따라나선다.
엉덩이가 화가 많이 난 하얀 얼굴, 두 손으로 쥐어지지 않을 종아리, 둘을 연결하는 튼실한 허벅지.
무섭다.
곧 뒤에서 잡아당길 것이니 조심하시라.
분명 파트너로 보이는데 따로따로 오르고 있는 외국인.
눈치 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방법으로 산을 즐기는 것이다.
배우고 싶은 삶의 방식이다.
멀리 서귀포의 섬들이 보인다.
우도와 성산 일출봉은 엷은 안개에 덮여 보이지 않는다.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는 주목들.
하얗게 탈색된 고사목들이 고개를 꺾고 또는 넘어져 있는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 언덕.
사람들의 간격이 촘촘해진다.
바람의 온도가 다르다.
맛도 상큼하다.
끝날 것 같지 않은 나무 데크를 오르고 또 오른다.
백록담(흰 사슴이 이곳의 물을 마셨다 하여) 정상(1,947m)
남한의 최고봉을 밟는다.
사진을 찍겠다고 한 시간씩 줄을 서고 있다는 사람들.
3시간 5분 만에 도달했다는 우리집 여자들은 땀도 한 방울 흘리지 않았고 숨 한번 헐떡이지 않았다니.
조금 늦은 나이이기는 하지만 히말라야로 보내야겠다.
김밥 한 줄씩, 물 몇 모금, 사진 몇 장.
생각보다 백록담의 물이 적단다.
분화구의 크기가 아담해서 실망했다나.
백두산 천지는 눈물이 나도록 가슴이 벅찼다는 기승이 기용이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래 백두산 천지를 가보자.
관음사 쪽으로 내려갈까 했는데, 길이도 길지만 돌계단 때문에 생고생이라는
정호의 말을 듣기로 했다.
얼마나 남았느냐고,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과 마주하며 내려간다.
바로, 이 맛이지.
힘들어 올랐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내려올 수 있다.
힘들 때가 있어야 편한 때도 있는 법.
꼭 산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인생 철칙.
숲길로 들어서고, 영원히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운동화를 신고 나선 여자들이 결국 후회하고 있다.
이렇게 경사가 많았느냐고 놀란다.
아들은 발바닥이 너덜너덜해진 것 같다고 인상을 구긴다.
힘든 일도 좋았던 시간도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법.
왜 그때는 몰랐을까?
그 좋은 청춘을 다 보내고야 알게 되었네.
지금이 인생의 제일 행복한 때라는 걸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겠지.
억지로라도 최면을 걸자.
오늘이 제일 행복한 시간이라고.
6시간 30분.
성판악 코스를 완등한 시간.
걱정했던 것보다 어렵지 않았다고.
한라산을 만만하게 보는 여인들과 제대로 발을 딛지도 못하는 아들을 데리고 고사리 흑돼지를 먹으러 가자.
유명집으로 찾아갔지만, 오후 4시 30분에 영업을 시작한다고 문전박대다.
근처의 칠돈가 본점으로 간다.
장작을 패면서 마님이라고 부를 것 같은 떡대가 쫙 벌어진 총각이 고기를 구워준다.
갈치젓에 찍어 깻잎장아찌에 싸 먹는 목살은 쫄깃쫄깃하고 구수하다.
1인분 300g에 33,000원.
오겹살은 따로 구워 판에 올려준다.
비싸서 더 맛있는가?
김치찌개와 보리 비빔밥까지 완전 정복.
충분히 자격이 있다.
힘들었지만 생전 처음으로 남한의 가장 높은 곳에 오르는 경험은 두고두고 이야기할 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것은 상상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