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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를 이고지고

애월한담해안, 비행장 옆 용담해안, 관음사, 고도 500

by 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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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11. 목 >

해가 중천이다.

해안을 향해 쭉 내려가는 한가한 도로.

동네 정자엔 어르신들이 모여 더위를 식히고 있다.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30분 정도는 아깝지 않게 내줄 수 있다.

흰털 복숭이 개의 이름을 따서 지은 심바 커피 카레집.

곽지해수욕장 막다른 골목까지 갔으나 이전한 안내문만 달랑 붙어있다.


전쟁 때 헤어진 자식 찾아가듯 간절한 마음으로 돌고 돌아 찾아간 곳.

마당과 담에는 공사하는 연장이 아직 널려있다.

정식 오픈은 좀 멀었다는 간판도 없는 애월마을 맨 끝, 밭과 친한 집.

흰 천에 검은 점박이 스카프로 이마를 질끈 동여맸고,

테가 두꺼운 검은 안경을 쓰고,

짙은 눈썹에 처진 눈꼬리,

제법 긴 수염과 날카로운 눈빛,

하얀 티셔츠에 빨간 앞치마를 두른,

한 10대째 내려오는 일본의 요리 장인처럼 생긴 주방장.


돈카츠 카레, 계란 카레.

처음 접해본 맛이지만 거슬리지 않고 깔끔하다.

반찬은 무인지 비트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초절임과 단무지 비스무리한 것 딱 두 가지.

효리네 민박에 나왔다는 곳이라 그런가?

잘 대접받았다는 기분보다 ‘먹을 수 있게 해주어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다.

늘어져 자고 있는 심바, 더 주겠다는 카레와 먹다 남은 것 같은 밥에 심사가 꼬인 아내.

간절히 찾고 싶었던 전쟁 때 헤어진 자식은 아닌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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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월한담해안로(애월항에서 곽지해수욕장까지 1.2km)

파도 소리를 들으며 걷는 차가 없는 한적한 산책로.

맑은 비취색 바다.

그 색깔 때문에 끌리듯 왔다.

날씨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오늘은 유난히 선명한 옥색이다.

사진으로 꼭꼭 담으며 생각한다.

많이 보고 싶을 것이라고, 바다가 나를.

그보다 백배 더 많이 내가 바다를 그리워할 것 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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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그라나다(제주시 도공로 86-1)와 공항 담을 사이에 둔 언덕.

심한 바람과 안개 때문에 제대로 비행기를 담지 못해 아쉬웠다.

아주 천천히 낮게 내려오는 비행기를 보자 바로 달렸다.

아쉬운 것 없이 다 하고 가라는 설문대할망의 배려다.

마치 조종사가 잘 찍으라고 일부러 천천히 가까이 지나가 주는 것 같다.

그래도 인물과 비행기를 한 그림에 담는 것은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하다.

슬로우 찍기 기능을 빨리 알았더라면 고생은 덜 하는 건데.

분명 우리뿐이었는데, 정신 들어보니 장이 되었다.

어디를 가도 우리 주의로 몰려드는 사람들, 꿀 바른 빵에 달려드는 개미 같다.

좀 심했나, 아카시아 향에 끌려 몰려드는 벌 같다.

그렇게 한 40분을 햇볕에 구워졌다.


머리를 시원하게 깎은 날.

머리와 이마를 선명하게 구분했던 흰 테두리.

제주도의 힘센 햇볕이 다 뭉게 놓았다.

빨간 홍시 같은 얼굴 위로 바로 짧은 머리카락.

시간이 많이 흘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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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성판악과 함께 허가받고 백록담을 오를 수 있는 코스 출발점)

몸이 무겁다는 아내, 피로가 누적되나 보다.

비양도까지 다녀왔으니 딱히 서둘러 갈 곳도 없다.

찬찬히 시원한 숲길을 걷고 싶어 산록도로를 달려 왔다.

해발 650m의 중산간에 백록담을 바로 보는 넓은 절터다.

조선의 억불정책에 따라, 1702년 제주목사 이형상에 의해 제주도의 모든 절과 함께 사라진다.

1909년 안봉려관 스님에 의해 다시 창건된다.

스님은 해월굴에서 3년간 관음기도를 드리며 어렵게 법당과 요사채를 완공한다.

이후 통영의 영화사에서 불상과 탱화를 모셔 와 어엿한 절의 모습을 갖춘다.

절의 외형이 갖추어지자 제주시 중앙로에 포교당 대각사를 열어 적극적인 포교활동에 나선다.

그 결과 제주 불교의 중심으로 관음사가 우뚝 선다.

1948년 제주 4.3 당시 무장군의 사령부로 사용되면서 토벌군에 의해 전소하게 된다.

1969년부터 다시 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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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오신 날을 기다리는 연등이 입구에서부터 쭉 걸려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오백나한 석상이 좌우로 길을 보고 한 줄로 앉아계신다.

어느 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베트남 바이딘 사원을 연상하게 한다.

3년간 스님이 기도했던 해월굴과 미얀마의 평화를 기원하는 부처님을 함께 모시는 관음굴도 들러본다.


삼성각 앞 설문대할망 소원 돌을 들려고 낑낑대는 아내의 모습이 우습다.

아무리 용을 써도, 이리저리 굴려보아도 떨어지지 않아 도저히 들 수가 없다나.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신심이 부족해서 들어주지 않을 모양이다.

어떻게 세례명이 소화 데레사인 줄 아셨을까?

하여간 용하시다.


그림으로 그려놓은 사천왕상도 그렇고 금색 기와 대웅전의 아이를 잉태하고 낳고 키우는 모습을 한 여인의 탱화도 매우 소박하다.

아름드리 소나무 옆 금동 미륵 대불과 빙 둘러앉은 나한상, 입구의 하얀 대리석의 평화 대불의 규모는 또 생각보다 크다.

불교 음식 체험관, 템플스테이관과 망자들을 모시는 명월관까지 다양하게 신자들과 만나는 모습이다.

우람한 시설들이 차오를 모습이 훤히 그려진다.

편하면서 엄숙하고, 저절로 고개 숙여지는 기도 도량을 꿈꾸는 것은 나그네들의 소망인가.

절을 찾기 잘했다.

약천사도 관음사도 어쩌면 놓치고 갈 수 있었던 또 다른 제주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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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고도 500(제주시 산록도로 817)

신비의 도로와 청운마을 사이에 없는 듯 앉아있는 집.

지붕이 너무 낮아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

예술가의 손끝이 느껴지는 아기자기한 실내와 조금 어두워서 차분해지는 분위기.

고소하면서 진득한 크림몽콜라떼, 시큼상큼한 청귤에이드.

바삭한 바게트에 얼린 우유 지방과 꿀을 찍어 먹는 이름도 어려운 디저트.

생각보다 가격이 매우 착하다.


신비의 도로의 시작과 종점이 표시된 갓길이 있는데, 그냥 내리막을 내려오는 것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날 보고 웃는 저분들도 나와 같은 황당.

아기자기한 주변의 시설들이 이쁜 사진을 담기에 참 좋다.

혼자서 저 많은 메뉴를 다 만들어내는 사모님은 여기가 자기 집일 것이다.

오는 손님 막지 않고, 가는 손님 잡지 않는 서두르지 않고 여유롭기까지 한 공기.

득도한 어른들에게서 느끼는 아우라다.

눈이 쌓인 겨울에 와서 한나절 가만히 앉았다 가도 좋겠다.


산록도로를 작두를 타는 무당마냥 신나게 달리는 아내.

가슴을 쥐어짜며 화를 삼키는 망태.

그래 묘비에 이렇게 써달라.

‘당신 때문에 많이 행복했으나, 오래 살지는 못했다.’

국물 없이 먹은 카레밥 때문일까, 속이 더부룩하다.


오후 4시 30분의 이른 귀가.

얼큰한 라면 국물 후후 불며 마신다.

찬 머리고기에 막걸리가 막힌 하수구 뚫듯 가슴이 뻥 뚫린다.

저녁에 아들이 온다고 했다.

낚시배를 같이 타 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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