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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비양도

비양도, 한림매일시장, 한림성당, 곽지해수욕장

by 고주

< 5. 10. 수 >

분리수거장으로 떠나는 검은 비닐봉지 안에서 서로 먼저 나가겠다고 고개를 내미는 막걸리병 모가지들이 아우성이다.

누가 보면 막걸리 소믈리에인 줄 알겠다.

악다구니를 쓰며 날 위협하던 덩치 큰 흰둥이도 이제 멀뚱멀뚱 보고만 있다.

이십 일 넘어 보았으니 친해질 때도 되었지.


샤워하면서 양말이나 속옷을 함께 빠는 일도 익숙해졌다.

가끔은 밥을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여자들은 대문을 나서려면 여러 가지를 찍어 바르는 시간이 필요하니, 어색하게 싸한 공기 속에 덩그렇게 놓여있느니 뭔가 의미 있는 일에 투입되어야 한다.

그래야 같은 타이밍에 함께 나서는 행렬에 동참할 수 있다.

환경과 역할이 바뀐 것이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적응하는 일이다.


9시 50분. 차 안의 온도 27도.

햇볕이 피부를 뚫고 지나가는 것 같다.

고급스럽게 지중해의 날씨 같다고나 할까.

둘째가 오후에 지진과 태풍에 대한 안전체험프로그램에 예약해놓았다고 했는데, 비양도를 가잔다.

사실 딱 하나 남은 섬이 비양도다.

숙제 안 하고 등교하는 것처럼 찜찜해서, 아들과 함께 몰래 다녀오려니 생각했었다.


비양도를 뒤적이다 잠을 설친 줄 어찌 알았을까.

무섭다.

배가 아픈 것이, 내 속을 열어보고 안 보이게 몰래 꿰매 놓은 것은 아닐까.

내가 아내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인지, 아내가 나를 닮아가는 것인지.

외모도 생각도 거의 데칼코마니다.


1132번 도로에는 자전거 팀이 무리를 지어 대정 쪽으로 달리고 있다.

아마 등짝이 불날 것이다.

바다로 풍덩 빠지고 싶은 마음, 해본 사람만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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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양도(11:20 ~ 13:35)

제주에서 가장 늦게 태어난 젊은 섬이다.

고려시대에 화산 폭발로 탄생했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권에 남아있다.

비양도 압개포구 선착장에 도착하면 “고려 목종 5년(서기 1002년) 6월에 산이 바다 한가운데서 솟아나는데 산꼭대기에 4개의 구멍이 뚫리어 붉은 물이 솟다가 닷새 만에 그쳤으며 그 물이 엉켜 모두 기왓골이 되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중국 쪽에서 하늘을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는 것은 이 섬이 새로 만들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부 과학자들은 비양도의 나이가 27,000년 ~ 32,000년 정도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섬은 비양도가 아닌 다른 섬이라고 주장한다.

하여간 좋은 것이 우리 것이라고 우기자.


한림항에서 배가 출발하고 15분.

모자 모양의 섬이 다가온다.

올레꾼들이 가득한 배 안의 열기는 뜨겁다.

배가 떠나고 내리는데 닻줄을 올리고 내리는, 표를 검사하는, 배를 운전하는 할아버지들.

맘씨는 좋게 생겼지만 어째 좀 엉성하다.


섬에서 제일 번듯한 건물, 쉼 그대머물다 카페.

빙수와 커피값을 먼저 계산한다.

카페의 자전거를 타고 섬을 한 바퀴 빙 돈다.

땅속에서 물이 솟아 만들어진 펄랑못, 자그마한 둠벙인데 물이 짜다.

수석 거리와 돌 공원을 지나면 검은 현무암 사이에 우뚝, 아기 업은 돌이 나온다.

코끼리 바위 앞에서는 코끼리 코를 하고 또 사진 한 판.


코끼리 코를 하고 제자리에서 열 바퀴인가를 돌고 목적지를 다녀오는 게임이었다.

이리저리 다른 방향으로 가다 넘어지고, 하늘은 노랗던 압록의 모래사장.

대학교 MT 때였지 아마.


그때 이후로 처음 해보는 것인데, 생각처럼 쉽지 않다.

온몸이 불에 올라간 오징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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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하게 잡아도 40분.

지금은 폐교가 된 조개껍데기를 엎어놓은 것 같은 아담한 비양분교장과 바다 위에 떠 있는 본섬을 바라보며 앉은 2층 구석 자리.

층고가 높고 확 트인 시야가 시원하다.

작열하는 햇볕보다 뜨거운 조사님들의 손놀림.

가만히 던지는 것 같은데, 훌쩍 40m를 넘게 날아가는 가짜 미끼를 단 낚시줄.

고기 꼴을 볼 수가 없다.

물속을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고기들이 없어요.

지금 헛심만 쓰고 있는 것이요.

시간에 쫓겨 비양봉은 다녀오지 못했다.

뛰어서라도 다녀오고 싶었지만, 함께 가지 않으면 분란만 생기지 싶어 꼭 정상까지 가야하는 것은 아니라며 쿨한 척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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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매일시장.

시장 규모는 크지 않지만 매일 장이 선다는 것은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큰 고깃배, 화물선, 유람선들이 다닥다닥 붙어 쉬고 있는 큰 항구, 한림항.

이곳에 의지해서 입에 풀칠하며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멈춘 ‘풍년순대국밥’.

기름기가 좌르르 흐르는 족발을 써시는 아주머니의 날랜 칼솜씨.

얇게 썬 족발을 맵고 짜게 양념한 새우젓에 푹 찍어 씹으면 쫀득쫀득 이빨을 피해 입안을 돌아다니느라 난리다.

부드러운 허파는 덤.

선원인 듯한 동남아 젊은이들이 들어오며 내장탕을 시킨다.

할머니라고 부르지 말고 누나라고 하라며 쟁반을 들고 쫓는 아주머니.

꼭 소꿉장난하는 것 같다.

머리고기와 찰순대를 포장해서 나온다.

된장 새우젓 초장을 듬뿍 챙겨주는 사장님.

손님이 많은 집은 손이 큰 사장님이 있는 곳이다.

음식 아까우면 장사를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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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성당(2002년 북제주군 건축상 최우수상)

제주 근현대사에 있어 제주도민의 경제적 자립 등 지역발전에 큰 역할을 한 이시돌 목장을 만드신 임피제(맥그린치) 신부가 주도해 1955년 건립했다.

현무암의 검은 건축물은 도로 확장공사로 본당이 철거되고 지금은 종탑만 도로에 등을 대고 덩그러니 서 있다.

성당이 갑자기 헐린 뒤로 본당은 고등어와 옥돔부터 살충제까지 판매하는 모금 운동을 벌였고, 각고의 노력 끝에 2001년 한빛건축사사무소 김종우씨의 설계로 지금의 새 성당을 갖춘다.


성전 입구에는 주보 성인인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부조상이 장식되어 있고, 서양식 인물과 천사에 동양식 복식과 문양이 조합된 모습이다.

성전 내부는 흰 두꺼운 기둥이 띠 모양의 아치가 교차하는 천정을 받치고 있다.

십자고상이 걸린 중앙부는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옆면은 뾰족한 창문들과 강렬한 파란색과 붉은색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성당의 어둡고 자그만 실내를 파랗고 빨간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볕이 비춘다.

편안함보다 처연함이다.

죄의 용서보다 완전한 복수를 다짐하는 느낌.

내게는 그리 다가왔다.

순전히 피 색깔의 붉은 빛이 그리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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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구 종탑 뒤로 키 큰 종려나무와 높은 탑 두 개가 토끼 귀처럼 솟은 흰 성당은 단정하다.

14처가 담을 이룬 마당을 돌며 나오는 길, 젊은 수녀님이 서성이고 있는 길.

깨끗해진 느낌, 위로받은 기분, 마음이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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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은 곽지해수욕장.

구불구불 검은 현무암으로 떨어질 것 같은 곽지과물해변을 달린다.

바다를 담은 키 작은 현무암 담.

발 벗고 들어가 빠져나가지 못한 문어라도 잡아볼까.

10여 년 전 스쿠터를 타고 제주항을 빠져나와 처음으로 들른 곳.

등에 망태기를 지고 있는 해녀와 똑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었던 아내.

용천수가 솟은 목욕탕이 있는 해수욕장 끝 그곳을 다시 와보고 싶었을 것이다.

보고 싶은 것은 뒤로 미루지 말자.

고름은 절대 살이 될 수 없으니 바로바로 짜야 하듯이.


왜 이리 힘들까?

그동안 피로가 누적되었나, 쉬엄쉬엄 서두르지 않았는데.

그놈의 날씨 때문이다.

비바람에 흔들리다, 강한 햇볕에 삶아져 흐물거린다.

종잡을 수 없는 제주의 날씨여.

좀 천천히 눈치를 챌 수 있을 만큼만 표정을 바꿔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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